아버지, 사랑합니다

by 달보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버지가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 나는 아버지의 납득하기 힘든 선택들이 내 인생을 통째로 비껴 걷게 만들 거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스스로의 존재감, 눈에 보이는 세상이 기억주머니에 차곡차곡 담기기 시작할 무렵, 우리 집은 막창을 파는 식당이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 왁자지껄 시끌벅적 사람들, 식탁 위아래로 난무하는 술병들, 불판 아래 굳어 있는 돼지 기름이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아버지는 수많은 손님들 가운데에서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새하얀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받쳐 입고 뒤틀린 물방울 모양이 수놓인 밤색 멜빵을 두른 게 평상시 복장이었다. 두툼한 가슴을 팽팽하게 조이는 멜빵의 자태는 어린 눈에도 남달라 보였다.


본격적인 장사가 시작되기 전 화창한 햇살이 실내를 가득 메울 때쯤엔 항상 작은 가방을 겨드랑이에 구겨넣은 아저씨가 찾아오곤 했다. 분명 부드러운 인상인데 어딘가 꺼림칙한 기운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혹은 그를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가 왠지 석연치 않아 필요 이상으로 안 좋게 본 걸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이웃 아주머니들이랑 얘기할 때 종종 나오는 '일수 아저씨'가 그분이라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일수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게 썩 좋은 거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훗날 그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분명 장사는 잘 됐던 거 같았는데. 부모님은 대체 무슨 돈이 얼마나 부족했길래 가게 문을 닫는 날까지도 계속 그 아저씨를 상대해야만 했을까.


그중에서도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건 막창집에서 횟집으로 하루아침에 업종을 변경한 아버지의 행보였다. "자고 일어났더니 가게 앞에 수족관이 놓여 있더라"는 어머니의 고백은, 중학생이 되면서 가뜩이나 멀어지던 아버지와의 거리를 한층 벌려 놓았다. 막창 팔 때는 돈 걱정만 하면 됐었는데, 회를 팔면서부터는 학교 마치고 집에 들어가던 중 식당 앞 수족관을 힐끔 쳐다보곤 했다. 대개는 이름 모를 여러 가지 생선들이 배를 거꾸로 뒤집은 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하늘에 달이 뜨면 늘 북적이던 가게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빈자리가 눈에 띄게 늘었다. 존폐위기에 놓인 식당답지 않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버지는 늘 접시에 회를 아낌없이 담았다. 나는 아직도 회를 시키면 그때의 푸짐한 한 접시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니 어느 횟집을 가든 양적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수밖에.


결국 장사는 망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끝까지 횟집을 고집하는 바람에 우리 식구는 이사를 거듭했다. 좁지만 화장실은 있던 집에서, 좁은데다 화장실도 없는 집으로. 그리고 다시 화장실은 없지만 몸을 뉠 방은 있던 곳에서, 눕고 싶을 때 편히 누울 수 있는 방조차 없는 곳으로. 그러다 어느새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길을 걷다 보면 햇살에 칠이 벗겨지고 나뭇잎과 먼지로 뒤덮인 방치된 차를 가끔 본다. 그 당시 돈 많은 할아버지가 사준 아버지의 각그랜저가 딱 그 모양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나마 재산이라고 할 만한 수족관을 외삼촌이 새벽에 몰래 싣고 가 팔아버린 어처구니가 없는 해프닝도, 가세가 기우는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사과밭 부잣집 넷째 아들, 헬스장 관장, 대형세단 오너, 부족할 것 없이 자라온 청년기를 보낸 아버지는 자존심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식당 종업원으로 들어가 손님들에게 갖은 욕을 들어먹고, 동료 직원들과 기싸움 하느라 녹초가 되어가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장사를 포기하지 못했다. 보금자리 하나 없이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아버지는 남 밑에 들어가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현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무렵 우리 집의 가장은 서서히 뒤바뀌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아버지는 우리 집의 가장이 아니라, 본인 고집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역할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썩은내 나는 가난이 대체 얼마나 깊게 뿌리내린 건지, 나의 부모님은 지금까지도 가난으로부터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싸구려 신발을 빵꾸날 때까지 신은 것, 자판이 닳고 닳아 저절로 빠질 때까지 휴대폰을 쓰던 것, 유명 브랜드 제품들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건, 내가 효자라거나 심성이 착해서가 아니었다. 집안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그 어두운 시절을 난 저주하지 않는다. 물론 가난한 건 싫었다. 온전한 자기 방이 있는 친구들, 생일날 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끄고 선물 받는 친구들, 유행하는 메이커 가방이나 신발을 사는 친구들은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긴 했다. 다만, 그게 전부였다. 돌이켜보면 '쟤도 자기네 집이 있는데 우리 집은 언제까지 사글세를 살아야 하나'하고 푸념할 법도 했는데, 이상하게 그런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난 그저 컴퓨터 게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경험치를 쌓아 레벨을 올릴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장비를 맞출지가 그 당시 내겐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어쩌면 암울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게 해준 유일한 도피처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일찍부터 마음을 굳힌 것이, 집이 가난하든 말든 별로 개의치 않게 된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인생의 큰 윤곽이 잡혀서 그런지, 부쩍 기울어가는 가세에 얽매이기보다는 내가 가야 할 방향에 집중할 힘이 생겼다. 요즘의 평온한 일상은 부모님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려 하지 않았다면 결코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방식을 눈곱만큼이라도 답습하지 않으려는 고집은 내게 흘러드는 운과 부를 더 풍요롭게 만든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왜 그런 결정들을 내렸는지 모르지만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버지가 걸어온 길이 결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품게 했고, 그 마음이 내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다는 것.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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