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조금씩 갉아먹는 완벽주의
완벽주의는 그렇게 살금살금 내 인생을 파먹었다.
세상에 대한 눈이 조금이나마 뜨이고 나서부터는 내가 아닌 외부요소에 의지하게 되는 일이 점점 없어졌다. 믿을 건 나밖에 없고, 내가 생각하는 것만이 옳다고 느껴왔다. 어떤 일이 주어지면 남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디테일까지 눈에 들어왔다. 고민하고, 건드리고 만지면 만질수록 결과물의 퀄리티는 날로 높아져갔다. 그에 따른 반응도 좋았고 결과도 좋았다. 하지만 내가 완벽주의에 살금살금 중독되어 가는 줄은 몰랐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데 비해 아무런 변화도, 자극도 없었다면 차라리 중간에 포기를 했겠지만 내가 투자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만들어내는 것의 퀄리티는 높아져만 갔다. 그래서 점점 더 완벽주의라는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항상 듣던 대로 좋은 소리만을 듣고 싶었고, 항상 원하던 대로 내가 만족할 때까지 다듬고 싶었다. 문제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이었다.
잠을 포기하면서까지 고집했던 나의 퀄리티는 매번 한계치를 넘어서게 되었다. 남들이 인정해 주는 듯해도 깊이 없는 울림의 소리일 뿐이라는 것을 그땐 몰랐다. 그 당시엔 인정욕구에 메말라 스스로를 더욱더 채찍질하기에 바빴다. 눈앞에 놓인 나무는 매번 잘 팼지만 내가 베어나가야 할 전체적인 숲의 조망을 보려고 한 시도를 한 번이라도 해봤다면 조금 나았을까.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던 나는 결국 과부하가 걸려 시력과 열정 그리고 시간을 잃었다. 내가 그렇게 투자했던 일의 연장선상에 있는 업을 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는 것은 그 후로도 한참 뒤에나 알았다. 나 같은 빈틈투성이가 완벽주의 성향을 추구한다는 것은 아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생각이기에 머릿속에 떠올려본 적도 없었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이 유독 눈에 거슬렸던 건 그들에게서 '내 모습이 보여서 그랬던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이제야 해본다.
스스로 완벽주의에 갇혀 살았다는 사실은 책을 읽으며 사유를 하다 보니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완벽이라는 단어에 집착했던 시절은 내게 가장 불타올랐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덤비기만 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덕분에 지금은 자체방전이 되기 전에 알아서 컨디션 조절을 한다. 꾸준히 할 수 있는 습관을 들이려 노력하고 무엇보다 환경설정의 중요성을 인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은 아무래도 내 기질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받아들이고 왜 그런 심리가 발동하는지 스스로 연구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언제부턴가 슬금슬금 다가와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던 완벽주의는 이젠 내가 필요할 때마다 써먹는 훌륭한 심리적 도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