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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Mar 06. 2023

새 생명과 이른 작별을 준비하다

깊어진 관계, 성장한 우리


오늘..


새해 복 많이 받는 날 즈음에 아내의 뱃속에 들어선 우리 새복이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아쉬운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는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의 표정에서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이전의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과는 달리 그분은 정말 친절하셨고 현실적인 부분을 아주 자세하게 짚어주셨다. 결국 우린 길게 고민하지 않고 의사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며칠 뒤 우리 부부의 멘탈과 아내의 건강을 위해서 '소파술'이라는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의사 선생님이 우리에게 설명해 주신 소파술이라는 수술은 자궁 내의 태아를 흡수하여 빼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소파술을 따로 검색해 보니, '소파술(curettage)이란 외과적인 수술로 체강의 내벽을 긁어내는 것을 말한다.'라고 설명이 되어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의 심정은 '슬픔을 애써 느끼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다른 산부인과에서 우리 아이가 심장박동이 약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오늘까지 속으로 부디 건강하기만을 간절하게 바래왔다. 그에 비해 오늘 산부인과를 방문하기 전에는 어떤 결과를 듣게 되더라도 '나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은 겸허하게 받아들이자'라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갔었다. 그래서 그런지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덤덤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무덤덤해야 조용히 울고 있는 아내를 위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괜찮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애써 느끼지 않고 있는 슬픔이 언젠가는 나를 조용하게 덮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당장에는 보이지 않는 내 안의 슬픔이,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숨어있다는 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내는 잠이 들었고 나는 내 방에 혼자 있어서 감정을 쏟아내도 상관없지만 얼마나 마음을 독하게 먹었으면 아직까지도 감정의 동요가 없다. 마치 넓고 푸른 바다가 바람이 휘몰아치는데도 불구하고 파도 하나 일으키지 않고 고요한 것처럼 말이다.


결국 이렇게 난 내가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너무 예상 밖의 일을 겪어서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난 내 아내의 우는 모습을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런 예쁜 얼굴을 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살다 보면 내게 좋은 일만 일어날 수는 없는 법이니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조차 조용하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하지만,

애초에 아이를 낳으려고 한 결혼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평생의 파트너로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한 결혼이었다. 그런 아내와 나 사이에서 새로운 생명이 잠시 스쳐간 것뿐이다. 상황이 더 나쁘게 흘러가지 않고 내 아내의 건강을 확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번 계기를 통해서 난 내가 내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고, 이 사람을 평생 동안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이전보다 더욱더 커지게 되었다.


와이프도 잠시나마 조용하게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곧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하고 나와 함께 다음의 건강한 임신을 기약하기로 했다. 나의 아내는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현명했다. 겉모습으로 애써 강한 척을 하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감정에 솔직하고 상황에 얽매이지 않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녀를 보호해야 된다는 나의 의무감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이미 강한 사람이었다. 난 그런 그녀를 평생의 배우자로 맞이한 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나와 아내는 우리 사이에 나타난 작은 생명과 때 이른 작별을 준비하게 되었다. 한 달 하고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난 우리 아이를 만나게 되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어서 참 행복했다. 비록 바깥세상에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이렇게라도 잠시나마 내 인생에 나타나 아빠와 엄마의 관계를 더욱더 깊게 만들어주고 그만큼 성장시켜 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좋고 나쁜 일로 구분하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만약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한다면 좋은 일은 나쁜 일과 함께, 나쁜 일은 좋은 일도 함께 따라오게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처럼 이런 슬픈 상황 속에서도 내가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으니까.




저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계신 분들에게

사실 저는 지난주에 산부인과에서 태아의 심장박동이 약하다는 소리를 듣고는 며칠 동안이나 '심장박동이 느렸지만 기적처럼 건강하게 자라 준 태아'의 사례를 찾아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가 검색한 바로는 그런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오늘 저희 아이가 심장박동이 활발해져서 건강을 되찾으면 저 같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꼭 인터넷에 글을 올리겠노라 다짐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러지는 못하게 되었네요.


저희 아이의 현재 상태를 말씀드리면 임신 주수는 8주 차입니다. 하지만 심장박동이 80~90 사이라고 해요. 보통 이 정도 시기면 심장박동이 150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저희 아이처럼 심장박동이 낮으면 서서히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결국 유산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아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통로인 난황이 매우 컸습니다. 난황이 크다는 건 그만큼 영양분 공급이 활발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처음 아기집을 발견했을 땐 오히려 난황이 보이지 않아서 걱정했지만, 이젠 그 난황이 너무나 커다랗게 보이는 게 야속하네요.


사실 저는 아직도 마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리 아이의 심장은 약하게나마 뛰고 있으니까요. 혹시라도 며칠 뒤에 소파술을 받으러 갔다가 '아이의 심장박동이 기적처럼 활발하게 뛰고 있는 마법을 목격하게 되진 않을까'라는 작은 기대는 하고 있습니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닌 것처럼요. 하지만 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제 아내입니다. 만약 뱃속의 태아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주어서 바깥세상에 태어났을지라도 전 저의 아내를 더 사랑했을 겁니다.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없다고 믿는 저이지만, 이 마음은 변치 않을 거라고 장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속으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좋지 못한 태아의 상태가 아내의 건강까지 위협하기 전에 서둘러 수술하기로 과감하게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직접 겪어보니, 사는 것 자체가 왜 축복인 건지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런 경험을 많은 사람들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을 조용하게 가져봅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저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부디 힘내시라고 진심 어린 응원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 곳에서 응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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