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인생을 설계하다
참 열심히도 살아왔던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의자에 앉았던 날들과 아닌 날들로 구분이 된다. 이제 와서 과거를 돌아보니 느끼는 거지만, 의자에서 벗어나 걸어 다니거나 뛰어다니는 일을 하는 동안에는 참 고달프고 힘들었다.
원래 난 전공을 살려서 실내 디자인 설계직을 하려고 했었다. 디자인 프로그램 활용 능력이 뛰어나서 교수님도 내게 질문하는 일이 잦았고, 방과 후 학원비가 부담스러워 툴을 배우지 못하는 후배들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래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내가 당연히 책상 의자에 앉아서 일하는 설계직으로 취직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나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현장도 모르는 상태에서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설계를 한다는 게 맞지 않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설계를 제대로 하려면 현장부터 알아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난 대학을 졸업 후 현장에 자진하여 뛰어들게 되었고, 덕분에 개고생이란 게 무엇인지 제대로 체험할 수 있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실내건축 공사현장관리, 내장목수, 외장목수, 인테리어 목수, 용접, 판넬, 철골, 철강회사, 주물회사까지 상당히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일하는 세월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새 설계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고, 이미 몸은 현장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미친 듯이 몰입하며 책상에 앉아 공부했던 시절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컴퓨터를 활용하며 작업을 할 때면 자연스럽게 온라인 세상과 연결되는 일이 많아서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체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내가 몸 담고 있는 현장 일은 나름의 매력은 있었지만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했다. 온라인 세상의 가능성을 괜히 알았다 싶을 정도로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이미 경험했던 것처럼 곧 다가올 미래가 눈에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은 미래가 꽤나 밝았다면 난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미래의 풍경은 그리 밝지 않았다. 혹은 내가 현장일을 계속하기에는 성향이 맞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나는 설계 디자인을 제대로 하기 위해 현장을 찍먹 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어쩌다 보니 처음 취지와는 다르게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들은 내가 의자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깨우치는, 삶이 내게 선물하는 두 번 다시는 없을 값진 수업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있던 현장에 일을 배우러 오는 신입들의 평균 나이는 40대 초반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현장기술에 뜻이 있어서 온 게 아니라, 인생 전반전을 실패하고 갈 곳이 없어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기회와 가능성을 포착해 인생 제2막을 꾸려가는 훌륭한 분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인간 하루살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인생을 대충 사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현장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부정적인 기운을 풍기는 건 아니다.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주워듣고 찾아온 건지는 몰라도 처음 오시는 분들은 눈빛이 의외로 꽤 밝은 사람들이 많았다. 현장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꽤 높은 일당 하나만을 바라보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어렴풋이 계산해 봐도 웬만한 직장인들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몇 달만 일해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희망적이지 않은 현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현장을 찾아온 사람들은 겨우 품었던 마지막 작은 희망마저도 금세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오갈 데가 없어서 마지못해 현장에 일을 배우러 온 사람들 대부분의 현실이다.
아마 이런 현장 경험을 미리 경험하지 못했다면 훗날에 갑작스레 닥쳐온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나도 남들처럼 그곳으로 도망치듯 찾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곳은 결코 새로운 희망을 품을 만한 도피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직접 몸으로 부딪혀가며 뼈저리게 깨달았다.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창출할 수 없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실패했을 때 감당해야 하는 대가가 얼마나 큰지 간접적으로나마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모든 우여곡절을 뒤로한 채, 난 이제 다시 책상 앞에 글을 쓰기 위해 앉아 있다. 한때는 멀고 먼 길을 돌아온 거라는 생각에 지나온 나의 선택들에 대해 후회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들은 결국 내 인생이라는 '단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라 모든 일들에서 이유와 뜻을 찾을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배웠다.
의자에서 잠시 일어나 경험하고 온 세계는, 다시 내가 의자에 앉았을 때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장치를 내 안에 심어주었다. 당장엔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힘든 일일지라도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 봐야만 옳게 판단할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좋은 일, 나쁜 일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사건에 일희일비하며 제멋대로 상황에 대한 라벨을 갖다 붙이지만 않는다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온전히 나를 위해 일어나는 소중한 경험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삶은 축복이고, 경험은 선물이다. 세상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는 것은 존재를 자각함으로써 깨달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