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재가 될지언정 불타오를 수 있다면
카페에서 공부하던 분위기를 전혀 모르던 시절에는 매주 주말마다 혼자서 늦게까지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공부를 했었다. 내 전공수업 강의실은 문을 일찍 닫아서 옆에 있는 간호과 건물의 꼭대기층에 있는 빈 강의실에 몰래 들어가서 혼자 공부를 했다. 내겐 그저 빈 공간과 콘센트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땐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공부했다. 교수님이 내준 과제가 있으면 그저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 결과물을 만드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내 뜻이 최대한 잘 전달될 수 있게끔 나만의 생각과 철학에서 우러나오는 고유한 분위기를 담아 결과물을 만들었다. 달리 말하면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한 대답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내게 건넨 질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가장 '나다운 대답'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제대 후 복학했던 첫 학기에는 그렇게 늦게까지 혼자서 주말에 공부를 했다. 밤 10시 정도까지 공부를 하고 밖을 나가면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학교에 설치된 화려한 조명들이 세상을 환하게 밝게 비추고 있었는데, 꼭 내게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고생했다'라는 위로를 건네는 불빛 같았다. 그럴 때마다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공부를 이렇게 스스로 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대견함과,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조용히 몰래 혼자 치고 나가는? 듯한 뿌듯함을 매번 느꼈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이유는 '성적'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마음에 담지 않고 오로지 교수님이 던지듯이 건넨 질문에 '나만의 대답'을 준비하는 데만 몰입하는 식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복학하고 나서부터는 교수님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말뜻에 담긴 저의가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교수님이 무슨 과제를 내주던지 간에 당장에 뚜렷한 결과물을 떠올리진 못할지언정 교수님들이 내어주는 과제에 담겨있는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내게 '교수님의 질문'이 주어지면 난 그저 그에 맞는 '대답'을 할 뿐이었다. 시험기간 와중에도 시험을 치른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저 학기 내내 오로지 결과물에만 몰입할 뿐이었다. 심지어 학기가 끝나고 성적표 확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방학 도중 학교 행사를 도와달라던 교수님의 요청을 받고 학교에 한 번 찾아갔다가 교수님에 의해서 내가 과탑을 찍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평생 1등 같은 걸 어디서 해본 적이 없었던 나여서 그런지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말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성적표를 확인해 보니 학점 4.42에 올 A+ 를 받고 다음 학기 전액장학금이 확정되어 있었다. 내 생애 그렇게 1등을 찍어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 일이 내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과탑을 찍고 나서부터는 과제를 할 때마다 전에 없던 마음이 계속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1등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망'이었다. 그 욕망이 내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으면 참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욕망은 되려 나를 훼방 놓기만 하는 방해꾼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물을 제출할 때면 '혹시 이게 잘못돼서 성적이 낮아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자꾸 따라붙어서 나를 괴롭혔다. 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생각을 하기 싫다는 것만으로는 결코 생각을 떼어낼 수 없었다.
그런 헛된 욕망에 한 번 사로잡히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감싸고 돌기 시작했다. 과제를 할 때면 적당한 선에서 끝내지를 못했다. 이를테면 듣도 보도 못한 기능을 독학해서 결과물에 첨가해보겠답시고 제출기한이 다 되어가는데도 방향을 틀어버리는 위험한 판단을 자주 일삼았다. 덕분에 밤새는 일이 너무나 많아졌다.
참 다행인 것은 그런 나의 노력들로 인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과탑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시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복학하기 전에는 1.5였던 시력이 졸업하고 나니 0.1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사회에 진출하여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학교에서 받은 성적이 얼마나 쓰잘데기 없는건지 대부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난 욕심에 눈이 멀어 눈이 멀게 되는 아주 큰 손해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에 대하여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과탑을 찍고 욕심에 휘말려도 보고 했던 그 과정은 내 인생 전체에 영향을 주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평생 그렇게 몰입해 본 적은 없었다. 덕분에 나도 내 인생에서 황금기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세월이 하나 추가되었고, 그때 그 시절 생각만 하면 언제나 뿌듯한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요즘에도 힘들거나 지치는 일이 있으면 예전에 열심히 했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떨어지던 자신감을 다시 부여잡곤 한다. 과거에 한 번 '해냈던 경험'이 있다는 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마음속으로 불순물이 섞여 들어오기 전에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을 한 번쯤 해보는 경험을 꼭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어떤 사견을 첨가하지 않고 '그저 하는 것'에만 몰두할 수 있을 때 가장 가치 있는 결과물이 나오게 된다고 믿는다. 그 결과물에 대한 평가는 중요한 게 아니다. 가장 순수한 상태로 어떤 것에 몰입하였던 경험 자체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만약 어떤 것에 몰입해야 하는 상황 앞에 놓여 있지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할 수 있을 때 원 없이 다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런 시기는 본인이 원할 때 만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한평생 중에 언제 찾아올지 모를 소중한 기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너무 자신을 불태운 나머지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면 비로소 '위에서' 세상 전체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커다란 후회를 남기기 전에 할 수 있을 때 몰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인생의 다시 오지 않을 황금기를 앞두고 있는 사람을 위해 항상 멀리서 응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