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독에 붓고 있던 내 시간을 지키기 위해
난 시간이 간절 필요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직장을 옮겼다. 그 덕분에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첫 출근날부터 뭔가 이상했다. 퇴근시간은 분명 6시인데, 6시 정각이 지나도 아무도 퇴근하려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야근하는 게 당연한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6시 30분이 다 되어갈 때쯤 팀장님이 "오늘은 첫 날이니까 이쯤 퇴근해 봐"라고 말했다. 그때 '내가 뭘 들은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왠지 속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애써 아닐 거라며 나를 달래고 일단 퇴근부터 했다. 심지어 나혼자만 퇴근했었다. 그때 남아서 일하던 사람들의 영혼없는 얼굴엔 칼퇴근이라고는 아예 없는 것처럼 보였다. 찝찝했지만 일단 며칠 더 두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정시퇴근은 아주 가끔이었고, 30분에서 1시간 정도 일을 더 하는 날이 훨씬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더 심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밤 9시까지도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수습이라 그런지 항상 내가 먼저 퇴근하긴 했지만, 이대로라면 나도 나중에 그들과 함께 늦게까지 일하게 될 게 뻔해 보였다.
면접볼 때 질문을 잘못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착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물어본 건 딱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벌기 위해 이직하려고 한 만큼 난 무엇보다도 야근의 유무가 중요했고, 그곳으로 이직하기로 결정한 건 '야근은 거의 하지 않는다'라는 대답 때문이었다. 회사의 다른 조건이나 복지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근데 그런 서사를 품고서 야근을 하고 있자니, 일종의 취업사기를 당한 느낌이었다.
야근만 아니면 다 괜찮았다. 업무난이도는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적당했고, 사람들도 다 괜찮았다. 무례함이라곤 1도 찾아볼 수 없을만큼 모두 친절했다. 팀장님도 선한 인상만큼 좋은 분이셨다. 문제는 퇴근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중요했던 내겐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처음엔 30분에서 1시간 정도 야근하는 건 눈 감아볼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이미 새벽기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많이 벌고 있는데 모든 조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챙기려는 건 욕심인가 싶었다. 그리고 저녁에 제때 퇴근하지 못하는 건, 새벽시간을 더 악착같이 확보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런 내 인내심에 열이 오르기 시작한 건 업무파악이 어느정도 되고 난 이후부터다. 사실 아무리 내가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할지언정 마감기한까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야근을 해서라도 끝내려는 책임감 정도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일을 알면 알수록 그동안 야근하며 해왔던 업무들은 굳이 야근까지 하면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야근하는 게 견디기 힘들어졌다. 더군다나 팀장님은 눈 앞의 업무가 끝나기 전까지는 저녁을 먹지도 않고, 허리 필 시간도 없을만큼 쉬지도 않고 일하는 타입이었다. 충분히 내일 해도 되는 일을 꼭 늦게까지 남아서 끝내려는 건, 단순히 팀장님의 욕심 또는 불안감에 의한 거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입사할 당시에 팀장님 밑에 있었던 직원 2명은 이미 나가 떨어지고 없는 상태였다.
결국 내가 참지 못하고 터진 날은 오후 4시부터 밤 9시까지 단 한숨도 쉬지 않고 밥도 거른 채 야근을 내리 달린 날이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도와주고자 팀장님에게 눈치를 주기 위해, 일부러 언제 집에 오냐며 계속 문자와 전화를 번갈아가며 보내왔지만 소용없었다. 컴퓨터 화면에 pc카톡 메시지를 보란듯이 띄워놓아도, 계속 울리는 전화 벨소리도 팀장님의 안중엔 없었다. 그분의 머릿속엔 오직 일밖에 없었다. 일 생각밖에 못하는 팀장님의 모습을 보다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태껏 무의미하게 일해왔던 시간을 모두 보상받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오늘 그냥 넘어가면 앞으로 계속 이렇게 일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오늘만큼은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야근에 대한 문제를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려고 마음 먹었다.
팀장님 입에서 퇴근하자는 소리가 나왔을 때는 이미 밤 10시가 다 되가고 있었다. 난 그 말이 끝나자마자 책상을 팍 치고 일어나며 "도저히 이렇게는 더 이상 일 못합니다.", "이렇게 일할 거면 퇴근시간은 왜 있는 겁니까"라고 소리치듯 따지고 들었다. 팀장님은 그런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댔지만, 이미 난 흥분에 휩싸여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내게 "어쩔 수 없었다", "늦게까지 일 시켜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반복하기만 했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고 답답했던 나는 "이런 식으로 일한다면 제가 이직한 의미가 없습니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문을 박차고 나가 집으로 가버렸다. 마지막으로 봤던 팀장님의 표정에서 고분고분하고 얌전하기만 하던 나의 급발진을 보고 많이 놀라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죄송스럽긴 했지만 원망스러운 마음이 훨씬 더 컸다. 그는 내게 거짓말을 했고, 안 해도 될 일을 밥도 거르며 의자에서 엉덩이도 한 번 떼지 못한 채 매일 밤 늦게까지 일을 시켰던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그렇게 사회생활에 뛰어든 이후로 상사에게 처음으로 소리치며 대들었다. 속은 시원했지만 기분은 영 좋지 않았다. 한 번 화를 냈다고 해서 큰 변화가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소중한 시간을 모조리 빼앗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극에 달한 나머지, 참지 못하고 감정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늦게 팀장님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다. 늦게까지 일 시켜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내일부터는 무조건 칼퇴를 보장하고, 혹시 야근할 일이 있으면 사전에 통보를 할 것이며, 야근하더라도 1시간을 넘기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문자를 보자마자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았다. 내 유일한 불만은 무의미한 야근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말을 덥석 믿진 않았다. 다른 직원들처럼 나까지 그만둘까 봐, 급한 불 끈답시고 한 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 외로 다음 날부터 팀장님은 문자에 적혀 있던대로 약속을 지켜주었다. 칼퇴는 일상이 되었고 야근은 한 달에 한 번 할까말까였는데 그마저도 30분 남짓이었다. 팀장님에게 들이받은 그날 이후로 야근은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다른 회사를 다니는 것 같았다. 확실히 야근이 없어지니 저녁시간을 안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매일 혼자 저녁을 챙겨 먹던 아내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고, 여유롭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만큼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소름 끼치는 건 야근을 하지 않아도 업무진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계속 야근을 했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팀장님 본인도 야근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잘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가끔 하던 업무를 마저 마무리하고 갈 생각에 일을 좀 더 하고 있으면 집에 빨리 가라고 재촉하셨기 때문이다. 그날 밤 팀장님에게 화를 낸 게 죄송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조용히 넘어갔다면 아마 아직까지도 야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잘한 일은 아니지만, 나를 위해서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난 감정기복이 거의 없는 만큼 얌전하고 온순한 편이다.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누군가와 주먹다짐을 해 본 적도 없고, 말싸움을 한 적도 없다. 죽고 못살 정도로 친한 사람도 없지만, 안 친한 사람도 없었다. 남에게 크게 불만을 토로한 적도 없었고, 납득하지 못할 만한 게 있으면 내 생각을 바꾸는 편이다. 그런 내가 상사에게 대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장님에게 하극상을 벌이듯 화를 내며 따지고 들었던 건, 쓸데없이 낭비되고 있는 황금같은 시간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난 이후로는 한시간 한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귀했기 때문에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큼 참기 힘든 게 없었다. 그때 일만 생각하면 밑 빠진 독에 들이붓고 있던 내 시간을 직접 구해낸 것만 같아 묘하게 뿌듯한 기분이 든다. 나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인생에 화가 없는 내가 한 번 크게 화를 내 보고 나니, 본인에게 중요한 게 침해당하고 있다면 때로는 뒤집어 엎을 필요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