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날 왜곡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

자기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by 달보


난 이 세상에 처음 왔을 때 그저 한 명의 인간이라는 존재로 태어났을 뿐이다. 하지만 날 처음 맞이한 사람들은 날 보자마자 누군가의 아들로서 대했다. 이런 상황은 내가 자라면서도 계속되었다. 유치원에 들어가니 유치원생이 되었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초등학생이 되었다. 초등학교 안에서도 난 저학년이거나 고학년이었고, 어떤 스승의 제자였으며, 어떤 반의 학생이었다. 중학교를 올라가도 고등학교를 올라가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어엿한 성인이 되고 나니 나를 향한 그런 '분류'는 더 짙으면 짙어졌지, 결코 연해지지 않았다.


사실 그런 분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해지는 사회구조시스템에 맞춰 다 같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려면 필수적인 장치라고 본다. 그러나 그런 분류가 사회를 원활하게 돌아가게끔 만드는 도구로써는 훌륭할지 모르겠으나,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상황에서 만큼은 수많은 오류를 야기하는 게 현실이다.


난 내게 씌여진 출처 불분명한 프레임을 가족을 통해서 처음 느끼게 되었다.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할 때쯤엔 이미 난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가난한 가정의 장남으로서 해야 되는 것들도 추가적으로 따라붙었다. 나를 대하는 집안 어른들은 장남이라는 이유로 본인들 입맛대로 내게 근거 없는 기대를 걸고, 그에 맞는 부담감을 안겨주길 좋아했다. 세상에 태어난 건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꼭 내가 원해서 태어났고 그 대가를 치르기라도 해야 되는 것마냥 가족들은 내게 갖가지 족쇄를 채우길 좋아했다.




난 내가 분류되는 게 싫었다. 분류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나를 대하는 사람들은 나를 똑바로 볼 생각은 않고 내게 씌여진 프레임으로만 나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하게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한 가정의 장남 혹은 한 가정의 듬직한 아들로서만 대했다. 장남이라는 이유로 한 것도 없이 사랑받기도 했지만, 그만큼 어깨는 무거웠다.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고 그저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말만 남발하며 가뜩이나 버거운 인생의 무게를 더 무겁게만 만들었다.


난 어릴 때부터 그런 시선들이 싫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는 제시도 않고, 단지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뭘 해야 한다고 부담 주는 어른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부모님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실제로 어떤 아이인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뭘 잘하고 어떤 것에 관심 있는지 알아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착한 아이에 대한 정의도 제대로 서지 않은 채로, 무작정 내게 착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되도록이면 공부도 잘했으면 하는 아이로 자라야 한다며 함부로 말하길 좋아했다.


난 사춘기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어떤 외부적인 반항도 없이 얌전하게 커왔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은 내가 되게 온순하고 착한 줄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그들만의 착각이다. 난 오히려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선에서 남모를 반항심을 키워왔다. 주변 어른들이 근거 없이 내뱉는 거의 모든 말을 마음속으로부터 부정했다. '예의 있게 행동해야 한다', '장남이니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와 같은 말을 들을 때면 수긍은커녕 오히려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건지에 대한 의구심만 들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해소해 줄 법한 속 깊은 어른들은 아쉽게도 만나지 못했다. 반항도 꼭 보편적인 반항이라는 이미지가 정해져 있는 듯했다. 남들처럼 반항하지 않으면 그냥 얌전한 사람으로 보는 것도 생각하면 할수록 웃기는 일이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를 나로서 제대로 바라봐 주는 사람들이 매우 드물었던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세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다 보니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약 30년의 세월이 걸렸다. 오직 내 인생만 놓고 봤을 때는 그 세월이 참 적지 않게 느껴지지만, 주변 사람들과 저울질을 해 보면 또 내가 그렇게 늦은 시기에 나를 깨달은 건 아니라는 안도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큰 기대감을 품지 않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애초부터 나를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들, 타인을 깊게 바라보는 제3의 눈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나로서 보지 않고 사회적인 위치, 직장, 직책, 경제적 능력만으로 나를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애초에 이해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고 본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통해 남을 바라보게 된다. 고로 상대방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나부터 올곧게 직시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도무지 남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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