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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Dec 01. 2023

죄송하지만, 전 예의범절과 손절 치겠습니다

그놈의 예의범절을 더 이상 고수하기 싫은 이유


내가 예의범절에 대하여 처음으로 반감을 품게 된 것은 고등학생 때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부터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하니 수많은 어르신들을 볼 수 있었다. 보통 한가한 시간대에는 그들과 부딪힐 일이 잘 없지만, 주말이나 사람이 몰리는 번화가로 향하는 길이면 매번 나이 드신 분들과 직간접적인 마찰이 생기곤 했다.


처음엔 나도 집과 학교에서 배운 대로 어르신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지나가다 부딪히면 먼저 사과하는 등 나름의 예를 지켰다. 하지만 내가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바로는 아랫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배려해 주는 것을 너무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하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질서의식 자체가 없는 사람, 대놓고 자리를 비켜달라는 사람, 손으로 밀치고 지나가는 사람, 빈자리에 가방부터 던지는 사람 등 가만히 앉아서 보기 불편한 상황들을 자주 목격하다 보니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윗사람을 대접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어떤 날은 버스에 나 혼자 타고 있었는데, 어떤 할머니가 다음 정거장에서 올라타더니 대뜸 내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던졌다. 


학생, 거기 내 지정석인데 좀 비켜줄래?


지정석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왔다.

(물론 몸에 탑재된 자동 반사시스템에 의해서 본심과는 다르게 군말 없이 비켜줬다)


그때 이후로 거의 20년이 지났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어이가 없다. 이건 실화다. 생각해 보라. 버스에 혼자 앉아 있는데 누가 와서 저런 얼토당토 안 한 말을 냅다 던진다면 그런 일을 대체 까먹을 수야 있을지.




나이가 들수록 '예의범절을 왜 지켜야 할까'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져 갔다. 사실 평소에 머리는 여전히 예의범절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속마음은 전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예를 지킨답시고 해왔던 건 마음에서부터 진심으로 우러나오지 않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고수해 왔던 '착한 행동'들은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저런 상황에선 저렇게 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자동반사적으로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난 불편해 보이지도 않는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싶지도 않았고, 인상부터 욕심이 그득해 보이는 사람에게 굳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고 싶지도 않았다.


상대방이 나이가 적든 많든 그건 나와는 관계없는 항목이다.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나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이라는 이유로 예의범절을 지키고 싶진 않았다. 언제부턴가 나만의 주관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떤 행동이라도 그에 앞서 납득이 될 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무작정 공부만 하라고 등을 떠밀거나, '책을 읽으면 어떤 게 좋은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도 않고 그저 무작정 좋다는 이유로 독서를 강요하는 어른들의 말이 내게 하나도 먹히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여하튼 예의범절의 본질은 '서로 잘 지내기 위함'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그 뜻이 많이 왜곡되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마치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할 때 쓰기 좋은 일종의 도구처럼 사용하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예의를 여전히 지켜야 하지만, 되도록이면 난 최소한의 예만 지키면서 상대를 봐가며 대처할 생각이다. 난 모든 인간을 존중하지만, 그들의 본체가 아닌 욕망덩어리까지 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예의가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을 위하고 싶은 '진심 어린 마음'만이 서로를 진정으로 배려하고 위할 줄 아는 마음을 키워내는 거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지키고 있는 그놈의 예의를 난 더 이상 순순히 지키며 따르지 않을 것이다. 누가 만든 건지도, 언제부터 취지가 벗어난 건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되고 낡은 것들로 더 이상 내 삶을 채우지 않을 테다.


이래놓고 또 순순히 자리는 비켜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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