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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Dec 16. 2023

잘하려고 하지 마, 그냥 대충 해

열정도 지나치면 해롭다


우연히 '미혹하다'라는 말을 접하게 됐다. 생전 처음 보는 단어였기에 뜻을 검색해 봤다.


무엇에 홀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단어여서 검색해 봤더니, 처음 보는 단어였음에도 뜻은 너무나도 친근했다. 내가 바로 미혹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홀려서 정신 차리지 못하는 건 내 특기였다.


높은 곳에서 숲을 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눈앞의 나무 한 그루에만 정신이 팔려서는 그저 앞만 내다보고 달리는 건 항상 선수였다. 완전히 퍼져서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 되지 않고서는 내 몸이 지치는지 아닌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대학교 때 한창 과제 제출을 많이 하던 시절, 간단한 PT자료를 만들어도 쓸데없이 고퀄로 만들었다. 내가 생각한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게끔 다듬을 시간도 부족한데, 내용전달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슬라이드 배경 디자인에 상당한 시간을 쏟아붓곤 했다.


지금에 와서는 그런 것들이 미련하다 여기지만, 그 당시엔 왜 그리 그런 것들에 그리도 집착을 했는지 모르겠다.


달리 말해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는 일'들을 많이 벌렸다. 그런 나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항상 나뿐이었다. 에너지는 한정적인데 비해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바람에 매번 방전돼서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난 '꾸준히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지금은 다행히 그런 과거를 반성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황소처럼 돌진하려는 습성을 최대한 경계하는 편이다. 어쩌다 한 번씩 또 앞만 보고 냅다 달리려는 징조가 보이면 미리서 통제하고 자제하려고 많은 노력을 들인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한 가지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기.

일단 시작하기.

조금씩 행동하기.

잘게 쪼개서 생각하기.

하는 일의 목적을 자주 상기시키기.


그리고, 대충 하기.


다 좋지만, 그중에서도 대충 하는 것에 비중을 많이 두는 편이다. 난 하는 것마다 너무 잘하려고 해서 탈이었다. 그 잘하려고 하는 욕심이 꾸준함을 가로막는 주범이었고, 이젠 그놈을 차단하고자 신경을 최대한 곤두세우려고 한다.


이젠 내가 너무 지나치게 뭔가에 몰두하는 경향이 보이면 주변에서 먼저 알아차리고 '적당히 하라'며 신호를 준다. 그들을 보면서 '내가 평소에 얼마나 무리를 많이 했으면, 남들이 나보다 먼저 나를 말릴 생각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라는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한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정신 못 차릴 만큼 홀릴 필요도 있지만, 자신도 돌아보지 못할 만큼 미혹하게 깊게 빠지는 건 결코 좋은 게 아닌 것 같다. 세상은 그렇게 빡빡한 걸 원하지도 않을뿐더러, 한 사람이 애초에 드러낼 수 있는 발톱은 한정적이기에 너무 애쓸 필요도 없다는 게 요즘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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