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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Dec 25. 2023

인생에 책이 없던 내가 독서를 하게 될 줄이야

책 읽으면 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내가 복무했던 제주해안경비대 초소는 육군 부대완 달리 규모가 작았다. 당연히 PX 같은 건 없었고, 그만한 훈련도 없었으며, 부식 같은 건 모두 마트로 배달시켰다. 아직도 갖가지 사제 음식들을 싣고 오던 흰색 다마스가 눈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초소에 주기적으로 방문하던 차량은 그 다마스뿐만이 아니었다. 제주해안경비단의 각 초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움직이는 도서관'이라는 트럭이 찾아왔다.


'움직이는 도서관'은 길가에 흔히 지나다니는 1톤 트럭보다는 조금 더 큰 트럭이었다(사실 트럭이었는지 콤비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차량 뒤쪽 짐칸의 양쪽 외부에는 커다란 책장이 하나씩 달려 있었고, 뒤로 돌아가서 짐칸 안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책장들이 놓여 있는 구조였다.


자대배치를 받고 나서 처음 신병 시절 때는 당연히 책을 읽을 만한 여지가 없었다. 그땐 책은 커녕 맘 편히 숨 쉬기도 힘들었다.


계급이 올라가고 마음의 여유가 어느 정도 생겼음에도 여전히 독서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매주 책을 싣고 오던 '움직이는 도서관'은 부식을 싣고 오는 다마스보다 훨씬 덜 중요한 트럭일 뿐이었다.


평생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이 살아왔기에 당연히 책을 싣고 오는 차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움직이는 도서관'은 꾸준히 초소를 방문했지만.




1년이 지나고 상병이 되었다.


그 사이 난 조금 달라져 있었다.


초소 내 선후임 및 간부들에게 좋은 평가도 받고, 살아온 이래로 운동도 가장 열심히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북경대 엘리트 맞선임이 무심코 던진 '너 대체 이때까지 뭐 하고 살았냐'라는 보약 같은 쓴소리가 꽤 영향이 컸다.


그 말 한마디가 가슴속에 문양처럼 새겨진 후로는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나도 책이나 한 번 읽어볼까

어느 순간부터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이 나를 감싸고돌더니 이내 책의 ㅊ과도 친분이 없던 내가 '책이나 한 번 읽어볼까'라는 생각을 해버린 것이다. 


평생 책과는 인연이 없을 줄 알았던 내가, 아버지가 그리 읽으라고 입이 닳도록 잔소리를 하셔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내가 책을 읽어 볼 생각을 하다니.


내겐 가히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책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즈음의 주말에도 '움직이는 도서관'은 어김없이 초소를 찾아왔다. 생활관 창문 너머로 책을 실은 트럭이 유유히 들어오는 게 보였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벼르고 있어서 그런지, 매번 둘레길 옆 도로 지나가는 차를 쳐다보듯 무심하게 흘겨봤던 그 트럭이 새삼 달리 보이긴 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나가보자.


'움직이는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희미한 설렘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막상 책을 마주하고 나니 설렘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책 한 번 읽어 볼 요량으로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 앞까진 당차게 걸어왔다만, 책이 많아도 너무 많았던 것이다. 대체 무슨 책을 골라 읽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실제로 '움직이는 도서관' 안에는 그리 많은 책이 실려 있진 않았다. 아무리 책을 가득 실었어도 결국엔 차 한 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던 그 당시의 내겐 마치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빌딩을 올려다보는 먹먹한 기분이 들 정도로 책이 많아 보였다.


심지어 인생에서 책이라곤 교과서와 만화책 말고는 경험해 본 적도 없었기에 에세이가 뭔지도, 자기계발서가 뭔지도 모르던 때였다. 단어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알고 있는 장르라곤 소설뿐이었다.


어설펐지만, 나름 '책을 읽으면 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책장 앞에 서게 된 나였다. 근데 소설책을 읽는다고 과연 유의미한 변화가 있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소설을 짚기엔 망설여졌던 것이 고등학교 다닐 때, 무협소설을 만화책 보듯 코 박고 읽어대던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소설은 뭔가 그림 없는 만화책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책을 고르기가 힘들었다. 책 제목들도 죄다 외계어처럼 보였다. 곧 떠날 기미를 보이고 있는 '움직이는 도서관' 앞에서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끙끙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용기가 샘솟을 만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우선 읽는 습관부터 들여야 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괜히 어려운 책 골랐다가, 기껏 독서 한 번 해보겠다고 먹은 마음 금세 풀어지는 건 아닐까' 


'속는 셈 치고 소설책 딱 한 권만 읽어볼까'


그리고 가만 생각해 보니 난 소설책 한 권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재밌다고 칭송하던 해리포터조차도, 한 번 집어 들었다가 반틈도 못 읽고 내려놓았던 기록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뭘 안다고 소설을 함부로 판단하려 했을까.


더군다나 에세이, 자기계발서, 인문학, 고전 따위는 듣도 보도 못한 상태였기에 그나마 소설이 젤 만만해 보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괜찮은 책을 고르려는 생각은 내려놓고, 완독할 수 있는 책을 고르고자 전략을 바꿨다. 그래서 그나마 가장 눈길이 가는 제목의 책을 무작정 한 권 집어 들었다.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무릅쓰고 골라낸 책은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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