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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Dec 22. 2023

너 대체 이때까지 뭐 하고 살았냐

아무 생각 없이 대충 살아온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며


입대하고 1년 정도가 지나니 군생활의 모든 게 확실히 편해지긴 했다. 고참 눈치 볼 일도 많이 없어지고 할 줄 모르는 일도 없게 되니, 남은 거라곤 제대까지 남은 시간을 얌전하게 별 탈없이 잘 견디는 것뿐이었다.


상병을 달아도 시간은 여전히 하루는 24시간을 주기로 돌고 돌았지만, 꼭 반나절의 시간을 더 얻기라도 한 것마냥 남아도는 시간이 많아졌다.


만약 군대가 아닌데 할 게 없고 시간이 남아돌았다면 다시 컴퓨터 게임을 붙잡았을 가능성이 200% 이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난 여전히 군인이었고, 아무리 짬이 차고 세상이 좋아졌다고 해도 군부대에서 게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게 바로 운동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운동하려는 시도는 몇 번도 해봤었다. 혼자서 줄넘기를 해보기도 하고 친구 따라 헬스클럽도 등록해서 다녀봤지만, 재미도 없고 효과도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도중에 금세 그만두기 일쑤였다.


그런 내가 상병 때 할 게 없어서 마지못해 시작한 운동은 지방덩어리를 순식간에 10kg나 앗아갔다. 주변환경이 단순해지면 뭘 하기가 더 쉬워지는 걸까.


같이 운동하던 고참이나 동기들도 날씨가 짓궂은 날은 운동을 쉬던데, 난 찌든 더위나 살을 에는 추위에도 여의치 않고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했다.


더울 땐 나도 숨 막히고 추울 땐 나도 몸이 벌벌 떨리지만, 일단 운동하기 시작하면 육수가 나오면서 금세 더워지는 건 1년 내내 같았다.


그때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도 꾸준히 무언가를 할 수 있구나'를 느껴봤다.


딱히 동기부여나 강한 의지를 발휘해서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단지 우연히 시동이 걸린 게 관성의 법칙의 힘이 제대로 실려서 멈추기가 힘들었을 뿐이다. 꾸준함은 의외로 의지와는 그리 큰 관계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운동이 아마 시발점이었던 것 같다. 거의 평생을 남는 거라곤 아무 짝에도 없는 쓸데없는 짓들만 해오던 내가 운동을 하면서부터는 조금씩 인생의 변화를 도모하는 일들을 저지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운동할 때 매번 같이 하던 맞고참이 있었다. 그 형은 북경대 경제학과를 다니다가 휴학을 내고 뒤늦게 입대한 엘리트 출신이었다.


어느 날, 그 형은 호주 어학연수를 어렴풋이 계획하고 있는 나의 계획을 듣고서는 둘이서 함께 영어 스터디를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제대하면 언제 만날지 모를 엘리트 출신 브레인이 같이 영어 공부를 하자고 했으니 말이다. 그 형과 함께 공부를 하면 오히려 내가 빼먹으면 빼먹었지, 손해 볼 일은 결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우린 서로 영어 문장들이 들어있는 책을 한 권씩 사서 각자 공부한 뒤, 매 주말마다 영어 문장 시험을 자체적으로 봤다. 시험문제는 서로 번갈아가며 만들었다.


난 그때 이후로 운동이 끝나고 남는 시간엔 영어 문장만 줄줄 외우고 다녔다. 영어공부가 딱히 재밌진 않았지만 마땅히 그것 말고는 할 게 별로 없었다. 입으로 영어 문장들을 외다 보니 안 보고도 외울 수 있을 만큼은 외워져야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우린 계획한 대로 매주 주말마다 시험을 쳤다. 그런데 시험 결과가 의외였다. 처음 한 주, 두 주째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그 후로도 계속 같은 결과가 나왔다. 내가 그 북경대 엘리트 형보다 매번 점수가 더 높았던 것이다.

 

입대 전에 해왔던 기본적인 공부량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지만 그 형은 복습 삼아, 난 기초부터 다시 배우고자 시작한 영어공부였기에 예상치 못한 결과가 꽤 당황스러웠다.


그래봤자 점수는 한두 끗 차이이긴 했다. 다만, 시험칠 때마다 거의 단 하나도 틀리지 않는 나를 한동안 지켜보던 그 형은 여느 때처럼 함께 운동을 하던 도중에 갑자기 내게 평생 잊지 못할 한마디를 던졌다.


너 대체 이때까지 뭐 하고 살았냐.

한숨 내뱉듯 튀어나온 그 말이 '의문문'이 아니라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형은 게임만 하며 대충 살아왔던 내가 운동과 영어공부를 지독하게 하는 걸 보고서는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데, 이때까지 대체 뭐 하고 살았냐'라는 뉘앙스로 나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난 멋쩍은 미소와 함께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도 내게 따져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 넌 이때까지 대체 뭐 하고 살았냐'


난데없이 날아온 그 형의 말 한 마디에 세상이 주무르는대로 별 생각없이 살아왔던 지난 날들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과거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만 생각하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안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에게 관심 한 번을 제대로 주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난 존재만 해왔을 뿐, 진정한 나로서 살았던 적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었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은 좀 괴로웠다. 이미 지나가고 없는, 돌이킬래야 돌이킬 수도 없는 과거의 흔적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만약 그때 내가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혹시 그때부터라도 다시 공부를 시작했었더라면'과 같은 생각들이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을 잡아먹었다.




시간은 약이라고, 날이 흘러갈수록 나를 완전히 집어삼킬 것만 같았던 회한 서린 생각들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마치 나를 좀먹는 악동 같았던 생각들은 결국 망상일 뿐이었다. 남다른 과거의 흔적들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당장 눈앞에 놓여 있는 현실을 이길 재간은 없었다.


그렇게 마음의 폭풍이 한 바탕 지나간 자리엔 한 줄기 따스한 빛이 내렸고, 그 끝엔 '나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아쉬움으로 가득한 지난 시절은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남은 미래의 시간들은 마음만 똑바로 먹으면 얼마든지 찬란하게 꾸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마 난, 대충 살고 싶지는 않았나 보다.




혹시 그래서일까.

정신 차려보니 한 손에 책이 들려있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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