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째 뽑혀버린 공부에 대한 열망
우리 아버지는 가만 보면 아들의 날개를 꺾는 재주가 참 좋으셨다. 공부해서 한의사가 되라며 공부 잘 하는 아들을 대놓고 원하시는 것치곤 공부하는 방법을 전혀 가르쳐주지 않으셨다.
답답한 마음에 '공부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라고 물어봐도 소용없었다. 차라리 공부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고 내게 솔직하게 말해주셨으면 좀 더 나았을까.
아니다. 이래나 저래나 께름칙한 건 매한가지다.
참 다행히도 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고충은 6학년 때 만난 담임선생님이 잘 알려주신 덕분에 해결이 되었다. 그만큼 성적도 많이 올랐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어 보니 공부하는 방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기가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전형적인 문과의 피가 흐르고 있는 나를 가로막은 가장 커다란 벽은 바로 수학이었다. 유독 영어나 일본어는 따로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엄청 쉬웠다. 특히 영단어를 외우고 발음하는 건 일 같지도 않았다. 평생 영단어 시험을 치면서 90점 이하를 맞아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도 어찌저찌 혼자서 꾸역꾸역 공부를 놓지 않으니 중학생이 된 후 처음으로 치른 중간고사에서 등수가 꽤 올랐다. 배치고사 땐 전체 400명 중에서 242등을 했지만, 중간고사를 치르고 나니 90등까지 오른 것이다.
나름 유의미한 성적을 거둔 것 같은 마음에 성적표를 받은 날 바로 아버지에게 가서 자랑을 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온 말은 '너희 학교엔 공부 못하는 애들 밖에 없냐'라는 말이었다. 심지어 외갓집 사촌동생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자리에서 말이다(외갓집에선 내가 장남이었다).
아버지는 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머쓱해서 괜히 하시는 말씀이었을까.
어쨌든 그때 아버지의 반응은 뜨겁게 차오르던 공부에 대한 열망에 한 바가지의 냉수를 부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공부를 포기하진 않았다. 아까웠기 때문이다. 내가 90등 이상을 하지 못한 건 순전히 수학 때문이었다. 수학만 해결하면 최소 30등 이상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소한 내게 수학만큼은 다른 과목들과는 다르게 혼자서 도저히 파고들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난생 처음으로 수학만 가르쳐 주는 학원을 보내달라는 말을 던져봤다.
"학원 다닐거면 학교는 뭣하러 다녀?"
고민도 하지 않고 돌아온 아버지의 대답이었다(할머니집에 얹혀 살아야 될 정도로 집안이 기울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학원을 보내주지 못했다는 것을 그땐 어려서 몰랐다).
이때 난 공부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잃었다.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던 날개가 꺾이기는 커녕 아예 뿌리 채 뽑힌 격이었다.
그날 이후로 난 평소에 공부하는 일이 없었다. 완전히 내려놓았다. 양심상 시험 치기 며칠 전날부터 벼락치기 정도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현실에서 날아오르지 못한 욕망은 게임이라는 가상공간에서 시원하게 풀었다.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피시방에 가서 게임하는 게 유일한 낙이 되버렸다.
고등학교는 당연히 공부와는 가장 거리가 멀었던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공부할 마음도 없는데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서 야자까지 해가며 공부할 마음은 그 당시의 내겐 추호도 없었다.
비록 공부와는 담 쌓은 고등학생이긴 했지만 별다른 사고를 치지는 않았다. 다만, 주변 친구들이 한다는 건 담배피는 것 빼고는 다 따라하며 살았다. 간간이 술도 마시고 연애도 했다. 그 중에서도 게임을 가장 열심히 했다.
난 교우관계가 원만했던 것 치고는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가 없었다는 게 좀 아이러니한 점이다. 초등학교 친구들은 중학교를 올라가면서 학교가 찢어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중학교 때 피시방을 함께 오다니던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진학해도 평생친구로 남을 줄 알았다. 하지만 다들 고등학생이 되더니 난데없이 갑자기 담배를 입에 물기 시작했다.
교복 바지에 베이직하우스 면티 한 장 걸치고 구멍가게로 들어가 자신있게 담배를 사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는 게 싫었다. 골목길에 몰래 쭈그려 앉아서 담배 피는 친구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게 싫었다.
그래서 그들과 선을 그어버렸다.
근데 그런 나의 과감한 차단이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라는 신분이 어느 정도 몸에 달라붙을 때쯤 주변을 돌아보니 죄다 담배를 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는 담배를 피지 않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체감상으로는 나 빼고 전부 담배피는 애들처럼 보였다. 그만큼 담배를 입에 물고 다니는 애들이 많았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엔 아예 학생들이 몰래 담배 피는 외부 화장실이 별도로 있었다. 애들이 그곳에서 담배를 피면 학교 선생님들도 애써 모른 척 눈감아주는 분위기였다.
교내 화장실에서 담배 피는 건 간간이 학주쌤이 잡으러 다녔지만, 외부 화장실에서 피는 건 알면서도 그냥 지나갔었다. 지금으로선 이해하기 힘들지만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땐 실제로 그랬다.
담배피는 게 싫어서 중학교 친구들과 연을 끊었지만, 결국엔 담배피는 다른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된 격이었다.
뭐 어쨌든 고등학교 때 새로 어울리게 된 친구들과 3년 내내 잘 지내긴 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곤 내적 친밀감이 적정선 이상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이유로 어울리긴 했지만, 기본적인 성향이 나와 많이 달랐다.
그들과 난 필요에 의해 붙어있을 뿐, 서로 연결되지도 그럴 마음도 없다는 것은 서로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졸업할 때쯤엔 혼자서 그들과 거리를 두는 마음의 준비를 했고, 정말 졸업하고 난 후엔 그 친구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공부는 하지 않고, 딱히 친한 친구를 두지도 않으며, 학교 마치면 게임만 하는 별 볼 일 없는 놈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난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람'이고 싶었던 욕구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자진해서 군입대를 하고 그곳에서 겪게 된 일들을 떠올려 보면 말이다.
내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