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나의 6학년 담임선생님
어릴 적 우리 아버지는 내게 나중에 커서 한의사가 되라고 하셨다. 내가 한의사가 되길 바라셨던 만큼 당연히 공부를 하라고도 하셨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공부를 하라고만 하셨지, 어떻게 공부를 하는 건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원하시니 나도 공부를 잘해서 칭찬을 받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라서 답답했다. '공부는 어떻게 하는 거냐'라고 물어봐도 돌아오는 건 묵묵부답이었거나, 별로 소용도 없는 대답들 뿐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선생님이 내주는 숙제들만 간신히 쳐내며 살았다. 당연히 등수는 밑바닥이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공부에 눈을 뜬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6학년 때 만난 담임선생님 덕분이었다. 처음 그분을 만났을 땐 여느 선생님들과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근데 그런 분이 내 삶의 은인 같은 존재로 기억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담임 선생님은 사회과목 시간에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난 연도를 맞추는 퀴즈를 종종 열었었다. 선생님이 '임진왜란!'이라고 외치면 손을 들고 '1592년!'이라고 대답하면 되는 방식이었다.
의외로 내가 순간적인 암기력은 뛰어났던 건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몰라도 처음 그 퀴즈가 열렸던 날 정답을 꽤 많이 맞혔었다. 공부도 못하는 내가 불쑥불쑥 손을 들며 정답을 곧잘 맞히니 친구들은 날 신기하게 쳐다봤고, 선생님은 내게 진심 어린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 후로 난 역사가 일어난 연도를 작정하고 외우고 다니기 시작했다. 다른 공부는 다 제쳐두고(원래도 하지 않았지만), 오직 역사연도만 파고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항상 가슴 속 한켠에 강하게 남아있었던 것 같다.
혼자서 남몰래 연도를 외우고 다닌 보람이 있었다. 퀴즈를 진행할 때면 책상을 5개씩 모아서 조별로 점수를 매겼는데, 우리 조는 정답 수를 압도적으로 많이 맞추는 나 때문에 매번 1등을 차지했다. 그때 난 에이스가 되어보는 짜릿함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봤다. 그 쾌감은 상상 이상으로 자극적이었다.
아마 담임 선생님은 그때쯤 나를 의심했던 것 같다. 내 추측이지만, 반 전체 38명의 학생들 중에서 거의 32~34등을 하던 애가 유독 역사퀴즈만 열리면 혼자 휩쓸고 다니니, 선생님은 내게 뭔가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은 나보고 방과 후에 잠깐 남아서 상담을 좀 하자고 하셨다. 난 처음 그 말을 듣자마자 덜컥 겁부터 났었다.
실제 선생님과 방과 후에 대면하기 직전까지는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내 초조했었다. 공부만 하지 않았을 뿐, 친구들과 싸우지도 않고 지각도 결석도 하지 않으며 학교생활을 착실하게 잘하고 다녔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방과 후에 내가 맞닥뜨린 상황은 태어나서 초등학교 6학년이 되기까지의 13년 동안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내게 수학 기초 문제집을 대뜸 들이밀었다. 그리고 날 자기 앞에 앉혀 두고서는 수학 문제집의 첫 페이지에 실린 문제들을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가며 설명해 주셨다.
평소 수업시간 때는 귓등으로도 들어오지 않던 숫자 놀이가 선생님과 1:1로 마주한 상태에서 다시 들어보니 눈과 귀에 쏙쏙 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참 신기했다. 그렇게 두 페이지 정도의 수학 기초문제들을 선생님과 함께 풀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내게 별도로 숙제를 내주셨다.
"집에 가서 풀 수 있는 데까지 한 번 다 풀어봐"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는 일절 하지 않고 학교 마치고 집에만 가면 게임만 붙잡고 살던 내가, 담임선생님이 뜬금없이 문제집을 주며 집에서 문제를 풀어오라 했다고 해서 그 말을 또 곧이곧대로 따랐던 게 살짝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 난 선생님의 말을 아주 순순히 잘 따랐다. 집에 가서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문제집을 천천히 다시 열어보니 방과 후에 선생님이 가르쳐줬던 기초지식만 잘 활용하면 웬만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첫날부터 수학기초문제집의 거의 80% 이상을 혼자서 풀었던 것 같다.
사실 난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 가지는 몰라도 최소한 일고여덟까지는 혼자 터득하는 편이었다. 그건 내 기질도 한몫하겠지만, 아무래도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매번 하는 것마다 잘하고 싶었던 욕심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그 황당한 문제집을 건네받았을 때도 그저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풀었던 것이다.
내가 그때쯤 유독 칭찬에 목이 말라 있었던 이유는 그보다 훨씬 더 어릴 때는 칭찬을 꽤나 많이 받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눈에 들어오고 인생의 기억회로가 활발해지기 시작할 때쯤부터 난 여기저기서 좋은 소리를 많이 들었었다.
그림만 그리면 상을 타오고, 받아쓰기는 100점이 기본값이었다. 태권도를 다닐 때도 빨간 띠를 달고 있는 내게 사부님은 품띠(빨간띠보다 한 단계 위)를 달고 있는 애들에게 태권도 동작을 가르쳐 주라고 할 정도로 혼자 진도가 빨랐다.
과거에 칭찬을 받았던 역사가 아예 없었다면, 칭찬받을 때의 그 쾌감을 알 길이 없기에 아마 그토록 칭찬을 갈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여튼 그 다음 날, 난 방과 후에 남아서 선생님에게 하루 만에 거의 다 풀어낸 지저분한 문제집을 자랑스럽게 들이밀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선생님의 표정은 참 복잡미묘했다.
처음엔 선생님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면서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다 잠시 후 활짝 웃으면서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시긴 했지만, 이내 고민이 드리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는 게 보였다.
선생님은 미리 사뒀는지 곧이어 다른 수학 문제집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전처럼 수학 문제집의 처음에 나오는 부분들을 차분하게 설명해 주시고서는, 마찬가지로 집에 가서 나머지 문제들을 풀어오라는 숙제도 빼먹지 않고 내주셨다.
그렇게 난 중간고사가 다가오기 전까지 선생님이 사비로 사서 주신 총 3권의 수학 문제집을 혼자서 거의 다 풀었다.
난 당시 담임 선생님이 주셨던 수학 문제집을 풀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수학 문제집을 푸는 게 무슨 효과가 있는 건지 그리고 왜 풀어오라고 하는 건지는 생각도 고민도 하지 않았다. 단지 선생님이 문제집을 풀어오라고 해서 풀었을 뿐이다. 담임 선생님도 문제집을 풀어오라고만 했지, 그 외적으로는 내게 아무 말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도대체 왜 수학문제집을 3권씩이나 사비를 들이면서까지 사주며 날더러 그 많은 문제를 풀어오라고 했는지, 그 이유는 중간고사 당일 날 수학시험지를 받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수학문제집에서 풀어봤던 거의 모든 문제들이 회색빛깔 수학 시험지에 그대로 옮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 평생 살면서 시험지의 문제들을 그렇게 물 흐르듯이 풀어본 기억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1번 문제의 답을 적고 있으면서 이미 머릿속으로는 2번 문제를 풀고 있었을 만큼 문제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총 20문제 중에 5문제도 자신 있게 풀지 못했던 내가 20문제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풀 수 있게 된 것이다.
20문제를 전부 다 풀고도 시간이 남아서 엎드려 있던 난 조용히 몰래 웃고 있었다.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번지면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난 그놈의 빌어먹을 공부하는 방법을 깨달았던 것이다.
고백하건데, 그 순간에도 담임 선생님에게 감사한 마음보다는 스스로 뭔가를 깨우쳤다는 쾌감에 더 젖었던 것 같다. 정체 모를 자신감이 온 몸을 휘감고,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았음에도 이미 세상을 정복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샘솟는 게 느껴졌다.
그 중간고사가 끝난 후 난 32등에서 8등으로 올라갔다. 담임 선생님은 반 애들 앞에서 등수가 껑충 뛰어오른 나를 추켜세우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내 기억에 그 선생님이 아마 등수가 많이 올랐다고 칭찬한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한동안은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에게 공부하는 방법을 배웠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돌이켜보면 그 선생님은 내게 단순히 공부법만을 가르치신 게 아니었다. 난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난 은인 덕분에 '나도 하면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우치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건 실로 엄청난 가르침이었다고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런 마인드는 누가 쉽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밥숟가락으로 퍼서 목구멍까지 떠먹여 준다 한들 쉽게 삼킬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의 영향이 지금 내가 지닌 추진력과 실천력의 기반이 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여태껏 가진 게 없고 모자란 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움츠러들지 않고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건, 6학년 때 만난 담임 선생님 덕분에 나의 잠재 가능성을 미리서 경험해 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열 가지 중 한 가지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으며 무턱대고 공부만 하라고 등을 떠미셨던 아버지는 그분에게 많이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p.s
황지영 선생님.
이토록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음에도, 여전히 찾아뵙지 못하고 먼 곳에서 그리워만 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