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라는 가상세계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릴 땐, 친구들과 함께 메이플스토리라는 게임을 하며 살아가는 게 낙이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당연히 게임을 하지 않는다. 어릴 적 공부도 않고 게임을 했던 건 '철이 없어서 그랬다'라고 차마 말할 수 없을 만큼 여전히 게임을 좋아한다. 하지만 게임보다 중요한 일들이 현실에 많이 쌓여 있고, 그것을 다 해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못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보니 신기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나를 포함해 함께 게임을 함께 즐겼던 친구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던 방식대로 현재도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레벨 업과 좋은 장비를 모으는 건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장사에만 몰두하던 도적 친구가 있었다. 그는 게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이템들의 시세를 꿰고 있었다.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날마다 오르내리는 주식차트처럼, 게임 속의 아이템들의 시세도 들쭉날쭉했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의 알 수 없는 마음마냥 활개를 치는 시세를 꿰는 건 기본이고,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명 '사재기'를 즐기는 장사의 고수였다. 레벨은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낮았지만, 물건을 사고 팔 때마다 그에게 적당한 시세를 물어볼 정도로 게임 속 장사꾼들 사이에서만큼은 정말 유명했었다. 그야말로 '난 놈'이었다.
그 친구는 현재 서울에서 자동차 사업으로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한 장만으로도 모든 게 설명이 될 정도로 말이다. 그는 나와 얼굴 못 본 지도 10년이 넘어가는데, 축의금은 친구들 중에서 젤 많이 냈다.
다른 한 친구는 '올라운더' 혹은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마법사 친구였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최정상급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분야에서 평균 이상을 웃도는 경지에 이르렀었다. 레벨, 장비, 인맥, 인지도, 장사수완 등 모든 범위를 기본 이상으로 다루는 능력이 있었다. 확실히 보통 애들과는 남다른 두뇌를 지닌 듯했다. 쉽게 말해 잔머리가 좋다 못해 훌륭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현재 대한민국 중산층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물론 내 기준에서). 대기업을 다니고 있는 직장인에, 결혼 적령기에 사회적인 조건이 서로 크게 어긋나지 않는 준수한 아내를 만나,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린다. 인근 지역에 있을 만한 게 다 있는 좋은 신축 아파트에서 말이다. 한 마디로 참 잘 살고 있다.
친구들 말고 사촌동생도 게임을 같이 했었다. 그는 가장 비인기 직업을 즐겼으며 플레이스타일은 참으로 옅었다. 뭘 하고 살았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게임했다. 가상세계를 이탈하진 않고 꾸준히 플레이는 했으나, 뭐 하나 뚜렷한 게 없었다. 레벨이나 장비 등등에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가늠도 되지 않을 만큼.
그는 현실도 마찬가지로 옅게 살아간다. 근근이 살아가고는 있어 보이는데,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뭘 하며 사는지도 잘 모른다. 대화를 나눠봐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단지 나름 만족은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지표 하나만큼은 겨우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에겐 그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근데 그렇다고 또 그 안에 남들이 들어차 있지도 않았다. 참 요상하고도 신기한 기류가 그에게선 흘렀다.
난, 가상세계였지만 그 안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일거수일투족에 진심이었다. 배경 음악이나 주변 환경 등등 게임 속 세상을 자연풍경 보듯 가만히 관찰한 적도 많았다. 달리 말해 게임 개발자가 만들어 낸 구석구석을 즐겼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관심이 많았던 건 바로 성장이었다. 레벨 업에 관심이 많았다. 목표도 세우지 않고 무작정 레벨 올리기를 그렇게 좋아했다. 그만큼 주변인들보다 보다 높게, 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정점을 찍진 못했다. 직업을 자주 바꿨기 때문이다. 먼 길을 돌았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또 한참 레벨을 올리다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접게 됐었다.
나 또한 다른 친구들이 그랬듯, 게임할 때의 패턴과 크게 다르지 않게 현실을 살아간다. 사회생활에 뛰어든 이후로 하는 일마다 열심히 하지 않은 게 없었지만 심심하면 직장을 옮겼다. 게임에서 전사, 궁수, 마법사, 도적 등 해보지 않은 직업이 없었던 것처럼 현실도 그랬다. 빨간 날 없이 일하는 현장 파견직 회사원이었다가, 목수도 했다가, 용접도 하다가, 공장에서 하는 교대근무도 했었다.
이젠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며 빨간 날도 다 쉬는 사무직에 종사하고 있다. 그 와중에 글쓰기를 발견해서 작가라는 꿈을 꾸며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고 있다. 마치 게임에서처럼 돌고 돌다 막판에 방향을 바로 잡은 것처럼.
한참 게임할 때, 관심 가지는 이들이 별로 없을 법한 부분도 가끔 멍 때리며 응시하길 좋아했다. 그와 비슷하게 현실에서도 지나가다 콘크리트 사이에 올라온 풀 한 포기도 신기하게 쳐다보곤 한다(내 폰엔 그런 사진들이 많다). 게임자체를 사랑했던 것처럼 현실도 그렇게 사랑하는 것 같다. 하늘 너머 있는 우주로부터 내가 두 발 딛고 서 있는 땅에 걸친 모든 것에 애정을 품고 있는 걸 보면 더욱더 그렇다.
어쩌면 내가 남들에게 그리 관심이 없는 이유가 너무 광활한 것들을 마음에 담고 있기에 그리고 자연에 비하면 인간은 너무도 약소한 존재이기에 그들까지 애정할 여유가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게임과 현실의 궤가 크게 어긋나지 않는 나와 주변인들의 패턴을 꿰뚫어 본 게 맞다면, 그 발칙한 생각이 혹시라도 일리가 있는 추론이라면, 아직 남아 있는 삶의 여정은 꽤 기대해 볼 만하겠다. 이젠 아련한 추억이 돼버린 그때 그 시절의 가상세계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