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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Apr 12. 2024

친구 추천으로 들어간 모임을 빤스런하다

이젠 사라지고 없는 그때 그 모임


예전에 3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혼자 지내고 있을 때였다. 그런 내가 적적해 보였는지 한 친구가 지인이 운영하고 있는 모임을 갑자기 추천해 주길래 얼떨결에 가입하게 되었다. 일단 자기계발 모임이라고는 하는데, 공지사항도 그렇고 일정표를 봐도 그렇고 모임의 컨셉이 명확한 느낌은 들지 않았었다.


난 가입한 모임은 시간만 맞으면 웬만해선 참석하는 편이다. 그러려고 모임에 든 것이니까. 그런데 친구가 추천해 준 모임에 들어가고 나서 바로 다음에 예정된 계획이 1박 2일로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참석한다고 한 사람은 이미 열 명이 넘어갔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들 서로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딱 봐도 그 사이에 끼면 뻘쭘할 것 같긴 했으나 그래도 그냥 가기로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그렇게 놀아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다. 살면서 인간관계 쪽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은 거의 없었기에 금방 적응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통 친구들과 놀러 갈 때는 숙소로 직행해서 술부터 까고 보는 것에 비해, 모임 사람들과 함께 갔을 때는 펜션 가기 전에 들르는 곳이 많았다. 여행을 계획한 운영진 분이 곳곳의 문화유적지를 미리 조사하여 설명해 주기도 했다. 막간을 이용하여 가벼운 단체게임도 다양하게 했다. 사실 재미는 딱히 없어서 혼자 조용히 산책이나 하고 싶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튈 필요는 없었기에 나름 열심히 하려고 애를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직 이별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즐기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도 같이 찍고 얘기도 하면서 사람들과 안면을 조금씩 텄다. 내게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멀찍이서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고, 대놓고 친근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츤데레처럼 무심한 듯 조용히 챙겨주는 사람도 있었다.


노을이 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했다. 잠시 쉬었다가 바로 저녁 준비를 했다. 펜션에서 맞이하는 밤에 고기를 굽는 건 어느 단체를 가도 다 똑같은 듯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때깔 좋은 고기와 분위기를 돋궈줄 술로 달밤의 포문을 열었다. 술을 몇 잔 곁들이면서 사람들과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임엔 어떻게 들어오게 됐는지, 좋아하는 건 뭔지 등을 서로 주고받으니 마음이 좀 더 편해졌다.


달빛이 환하게 비출 만큼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사람들은 모임의 방향성에 대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난 신입이었기에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처음엔 잘 돌아가고 있는 모임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신규회원 유입이 원활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 수가 점점 떨어질뿐더러, 겨우 한 두 명 들어와도 얼마 있지 못하고 금세 나간다고들 하였다. 그런데 난 그 말을 듣자마자 왜 그런 건지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저기.. 이제 막 들어온 신입으로서 한 말씀드리자면, 신규회원 유입이 잘 안 되는 게 제 생각엔 모임의 컨셉이 불분명해서 그런 거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죠?"


"여기는 독서, 여행, 등산, 영화 등의 모임을 다 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근데 만약 제가 친구 추천으로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전 독서가 취미인 만큼 다른 독서모임에 들어갔을 것 같아요. 독서모임은 아니지만, 독서모임도 하는 이런 모임 보다는요."


"저희 모임은 그게 매력이에요."


사람들은 나의 솔직한 말에 적잖이 당황하는 듯했고, 내 말을 듣던 운영진 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다양한 컨셉의 모임을 진행하는 게 우리만의 매력'이라는 대답을 했다. 사실 그 단호한 대답을 들었을 때 난 모임을 나가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매주마다 다른 주제로 모임을 진행하는 게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진 모르겠으나, 최소한 난 아니었다. 한 가지 주제를 확실하게 파고드는 모임이 좋았다. 만약 책도 읽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으면, 독서모임 하나 영화모임 하나를 따로 들면 될 일이었다. 하나의 모임에서 갖가지 주제를 다룬다는 건 그만큼 깊이가 없다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신규회원 유입의 건'은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 하루가 지났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은 뒤 펜션 내부를 정리하고 두 번째 날 일정을 소화하고자 어느 유명한 장소를 찾아갔다. 그곳은 이효리가 핑클 멤버와 촬영했던 예능 프로그램으로 인해 알려진 곳이라고 했다. 가는 데만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집에 빨리 가고 싶었으나, 차가 없으니 옆에 얌전하게 붙어서 따라갔다.


도착해서 보니 드넓은 평야였다. 나무 그늘 밑에 돗자리를 피고 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처음 가기 싫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 보니 꽤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었다.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니, 절벽 아래로 작은 마을이 보였는데 경치가 예술이었다. 요즘은 억지스러운 포토존도 많은데 거기는 진짜였다. 감히 포토존이 될 만했다. 그런 만큼 사람들이 줄까지 서가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근데 줄이 꽤 길었다. 맛집 웨이팅도 하지 않는 내가 사진을 찍겠답시고 줄을 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단체사진을 찍어야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함께 기다렸다. 주변 풍경이 훌륭해서 천천히 크게 한 바퀴를 걸어보고 싶었으나, 포토존 차례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사람들 옆에서 같이 기다려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사진만 찍고 혼자 따로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기다렸다. 30분 정도 걸린 것 같았다. 하룻밤을 같이 보냈지만 여전히 어색한 분도 많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사진을 찍으려니 부끄러웠다. 겨우내 단체사진도 찍었으니, 이젠 주변을 천천히 돌아봐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전개가 펼쳐졌다.


"집에 가자~!"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들은 게 맞았다. 차로 한 시간 반 걸리는 곳까지 와서는 30여분을 기다렸다 고작 사진 한 장 찍고 돌아가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남는 게 사진밖에 없다지만, 정말 사진 몇 장 찍고 홀랑 떠나는 건 좀 아쉬웠다. 이 좋은 곳을 유유히 둘러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채로 카메라 셔터음만 내내 듣다 가는 건, 그야말로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어중간한 컨셉이 매력이라고 했던 전날밤의 발언 때문에 마음이 많이 기운 상태였다. 그런데 그 먼 길을 달려와 달랑 사진 몇 장 찍고 떠나면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아하니,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판단이 강하게 들었다. 그들은 그런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이제 정회원이 되었으니 가입비를 내라고 한 걸 보면 말이다(심지어 가입비도 비쌌다).


인연을 딱 잘라내기엔 아쉬운 사람이 몇 있긴 했으나, 가입비를 내라는 말에 모임을 나가겠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모임을 소개해 준 친구에게도 소식을 알렸다.


짧지만 강렬했던 1박 2일의 추억이 오래간만에 생각나서 글로 써 봤다. 막 즐겁거나 좋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곤 그때 보낸 시간과 사람들이 은근히 마음에 오래도록 잔잔히 남는 걸 보면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선에서는 또 괜찮은 면이 있긴 했었나 보다. 혹시 그 모임은 여전한가 싶어서 검색해 봤더니, 예상대로(?)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모임의 주제는 확실해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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