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세상과 더 친해졌다
어릴 적엔 티비를 좋아했다. 각 채널마다의 편성표를 줄줄 꿰고 있을 정도였다. 그때만 해도 밤 10시는 인기 프로그램들이 방영하던 메인 중의 메인 시간대여서 그즈음에 잠들 일은 거의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책을 읽으면서부터는 티비를 거의 보지 않았다. 티비 보는 것보단 독서하는 게 더 좋았고, 읽어보고 싶은 책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결국 한 달에 한 번도 티비를 틀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서 수신료를 일찌감치 끊어버렸다.
유부남이 되고 나서부터는 나만의 시간을 벌고자 새벽기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의 내게 밤 10시란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다. 늦어도 밤 11시 전에는 거의 잠에 든다. HJ도 그렇고(아내는 원래부터 일찍 잤다) 나도 그렇고 밤 10시가 되기 전엔 집의 모든 불을 다 끄고 각자의 침대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지금처럼 일찍 잠에 들기 시작한 건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지분이 채 10%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체감상으로는 어릴 적부터 이렇게 살아온 것만 같다. 얼마 전에 우연히 인기 프로그램 정규방송 시작 시간이 11시가 조금 넘어가는 걸 목격했다. 눈을 씻고 다시 한번 쳐다봤다. 그 늦은 시간에 본방송을 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밤 11시에 뭘 보기는커녕 잠자느라 '밤 11시'라는 시각을 본 지도 상당히 오래된 것 같은데, 그 시간에 그 많은 사람들이 안 자고 티비를 본다는 게 어색하게 다가왔다. 나도 한창 드라마를 챙겨봤던 시절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새벽에 일어나면 주로 카페로 가서 글을 쓰는데, 확실히 새벽엔 사람이 없어서 그 넓은 공간에 거의 나 혼자만 있다. '이렇게 손님이 없으면 조만간 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몰라서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언제 한 번은 글쓰기에 몰입하느라 밤 10시가 다 될 때까지 카페에 있어봤는데, 정신 차려 보니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자리가 다 차 있었다. 집이었으면 슬슬 자려고 각 잡고 있을 시간에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니 어색했다. 마치 다른 행성에 불시착이라도 한 것만 같았다.
'밤 10시가 되면 이제부터 시작'이었던 생활패턴이, '밤 10시가 되면 오늘은 여기까지'로 바뀌었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진 것만 같다. 실제 주변인들과도 멀어지긴 했다. 그들과 원만하게 어울리기 위해선 '밤 10시가 되면 이제부터 시작'의 태도를 고수해야 하는데, 이젠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10시쯤엔 자야 다음 날 새벽에 일찍 일어날 수 있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중요한 일들로 하루를 시작해야만이 온종일 편안한 마음으로 잘 보낼 수 있다. 이젠 더 이상 옛날처럼 밤늦게 티비를 볼 일도, 사람들과 어울릴 일도 별로 없을 것 같다.
누가 이런 날 보면 꼭 세상과 등지려는 사람처럼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실상은 반대다. 경험해 본 바로는 '무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지니, 오히려 눈에 들어오는 게 많았다. 내 생각과 내 마음을 좀 더 잘 알게 되고, 그만큼 이해하기 힘들었던 남들의 행태도 받아들이기가 수월해졌다.
군중에 잠겨 들었을 때의 난 '나'가 아니라, 나라고 생각되는 '그 무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