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보의 짧은 소설 1
하루 평균 10시간이 넘도록 꼬박 5년 동안 글만 썼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리 된 건지는 몰라도 우연히 시작한 글쓰기는 멈출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동안 내가 알고 지내던 인간관계는 모두 나가떨어졌고 곁에 남은 건 곧 나와 결혼하게 될 지윤밖에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안 그래도 그동안 알고 지내왔던 사람들이 모두 질렸던 참이었다. 아마 글쓰기 삼매경에 빠지지 않았어도 그들을 만날 일은 없었을 테다.
더군다나 잃은 것보다 얻은 것들이 더 많았다. 그동안 난 6권의 책을 출간했고 3권이 10쇄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그 덕에 김영하 작가처럼 유명세를 탄 건 아니지만 어디 가서 "나, 작가라는 사람이요."라고 명함 정돈 당당히 내밀 수 있는 위치까진 올랐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긴 해도 그리 오만한 판단만은 아닐 것이다. 여하튼 학교 다닐 땐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작가의 삶을 난 지금 살아가고 있다. 창작은 그 자체로 도무지 적응될 수가 없는 고통이지만, 쓰지 않을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게 가장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번도 같이 일해본 적이 없던 이름만 대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조차 알 법한 대형 출판사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안녕하세요 박작가님. 넋두리 출판사 편집자 김옥이라고 합니다. 혹시 통화 잠깐 가능하신가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근데 무슨 일로..?"
"다름이 아니라 내년 상반기에 함께 작업할 5인의 작가를 정하는 내부 회의를 거쳤는데요. 그중 박진감 작가님이 선정되는 바람에 이렇게 갑작스럽게도 연락을 드리게 됐거든요."
"제가요?"
비록 난 6권의 책을 출간한 이력이 있었지만, 넋두리 출판사만큼 대형 출판사와 일해본 적은 없었다. 체계를 갖추고 여러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협업하여 한 권의 책을 뽑아내는 대형 출판사는 어떻게 일을 진행하는지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찰나였다. 근데 그렇게 갑자기 연락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엔 얼떨떨한 마음에 어안이 벙벙했는데 미팅 날짜를 잡고 나서 전화를 끊고 보니 기분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인생이 피려니까 알아서 일이 들어오는구나 싶었다. 내 입장에선 지긋지긋한 회사를 다니지 않고 좋아하는 글쓰기로만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근데 어쩌면 그 글쓰기도 너무 치열하게 할 필요는 없을 정도까지 난 크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뭔가 흐름이 그랬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상하리만치 묘한 기분이 나를 곧 날아가게 해 줄 것만 같았다.
넋두리 출판사와 미팅 날짜가 잡혔다는 사실을 지윤에게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윤은 친한 친구들과 3년 만에 계모임을 한다며 어제부터 속초로 떠난 상태였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보단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회포를 푸는 분위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사실 이제 막 미팅이 잡혔을 뿐이지 제대로 뭐가 진행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음이 푸근한 게 여유가 맴돌았다. 날씨도 좋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데 태양빛이 뜨겁지도 않았다. 바람도 살살 분다. 완벽한 산책의 타이밍이었다. 난 행복감을 여밀 때면 산책을 했다. 걱정거리 없이 걷는 것만큼이나 내가 잘 살아가고 있단 느낌이 와닿는 활동은 아직 찾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돌던 동네 한 바퀴 코스를 천천히 걸었다. 팔꿈치와 무릎의 관절 마디마디의 꺾임과 발바닥을 감싼 신발이 땅바닥에 닿고 떨어지는 걸 느끼며 세상을 한껏 만끽했다. 근데 문득 항상 지나치기만 하고 들어가 본 적이 없던 브런치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저런데 가서 대낮부터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은 아마 돈 많이 버는 남자랑 결혼한 가정주부들이나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순간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귀신에 홀린 듯 나도 모르게 브런치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창은 크게 내놓고 레이스 커튼으로 온통 실내를 안 보이게 해 놔서 어떻게 생겨먹은 공간인지 평소 궁금했었는데, 막상 내부로 들어와 보니 그야말로 브런치 카페다웠다. 사실 브런치 카페같은 데는 처음 들어가 봤지만 엔틱풍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가구들이 즐비한 게 아주 당연한 그림 같았다. 다행히(?) 손님들은 아무도 없었고, 사장님은 '이 시간에 웬일이지'가 묻어나는 표정으로 날 맞이했다. 아마 난 어느 정도 성공인의 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혼자 브런치 카페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우는 것으로 셀프축하를 하고 싶었던 걸까. 주문은 간단히 추천 메뉴로 사장님께 부탁하고 한 손은 턱을 괸 채 바깥풍경을 바라봤다.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듯, 안에서도 밖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놈의 레이스 커튼.
잠시 후 테이블 위에 있던 아이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수신인을 보아하니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부산에서 살고 있는 친구였다. 거의 매년 분기마다 한 번씩 고맙게도 나의 안부를 물어오는 의리남이었다. 안 그래도 혼자 앉아 있느라 무료한 참이었는데 잘 됐다 싶은 마음에 냅다 전화를 받았다.
"한 사장님~ 웬일로 또 전화를 주셨능교."
"야, 진감아. 너 지금 어디냐?"
목소리가 평소처럼 밝진 않았다.
"나? 집 근처 브런치 카페에 혼자 밥 무러 왔는디 왜?"
"하.. 그럼 저기서 제수씨랑 팔짱 끼고 걸어가고 있는 남자는 대체 누구냐.."
"...뭐?"
때마침 추천 메뉴로 부탁한 브런치 메뉴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맛은 안 봐서 모르겠지만 데코만큼은 기가 막히는 접시였다. 비주얼이 너무 훌륭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도 쓰렸다. 하필 인생 처음으로 발걸음하게 된 브런치 카페였는데, 이제 앞으로 브런치라는 단어를 보면 그리 좋은 기분이 들 것 같진 않아 보인다.
뭐 이딴 인생이 다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