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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Jun 24. 2024

독서모임 가입했다가 결혼하게 된 썰

비혼주의가 늘어나는 세상에서 결혼을 외치다


주변을 돌아보면 모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집 살 돈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결혼을 망설이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난 결혼에 대한 생각만큼은 예전부터 확고했었다. 가만 보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웬만한 이들보다도 난 더 가진 게 없었다. 그럼에도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겠단 의지는 꺾이질 않았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렸다고 철석같이 믿어왔기 때문이다.




어릴 땐 서른 살이 넘어가면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오손도손 잘 살 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서른 살이 되어보니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현실에 난 놓여 있었다. 직장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결혼을 생각했던 여자친구와는 1년 전에 헤어졌고, 모은 돈도 별로 없었다.


"몇 살이고?"

"서른한 살입니다."

"결혼하긴 글렀네."

"예?"


"나이도 먹을 만큼 뭇는데 애인은 없고 모은 돈도 없이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넘어왔으니까 결혼은 못 한다 봐야지 않겠나. 그렇다고 니가 키가 큰 것도 아이고 잘 생긴 것도 아인데, 이빨에 철길까지 이쁘게 깔았으이 말 다 했지 뭐."


고향을 도망치듯 떠나 이직한 곳에서 만난 직장 상사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초면에 기분 나쁠 법도 했지만, 모두 반박할 여지도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동의할 수 없었다. 그건 바로 결혼하기 글렀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 당시의 난 내가 봐도 결혼은커녕 연애할 사람도 만나기 힘들어 보이긴 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해서 결혼을 못한다고 여기진 않았다. 난 어떤 경우라도 사람은 꼭 만나게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은 거의 확신에 가까워서 곧 내 앞에 나타날 사람을 남몰래 기다릴 정도였다.


그렇다고 마냥 앉아서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했다. 우선 직장동료들과의 술자리를 모두 거절했다. 결혼을 떠나서 술 마시는 날보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현저히 적은 그들과 계속 어울려서는 좋을 게 없어 보였다. 어차피 직장을 옮기거나 퇴사하면 연락하지 않게 될 인연들이었기에 더 그랬다.


그리고 운동을 시작했다. 그때 다니던 회사는 근무형태가 3교대여서 퇴근시간이 오후 3시, 밤 11시, 아침 7시였는데, 다행히 회사 기숙사 근처에 24시간 헬스장이 있어서 아침이고 새벽이고 퇴근만 하면 바로 헬스장으로 직행했다. 가뜩이나 일한다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운동하러 가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지만, 내 사람을 언제 만날지 모르니 운동은 할 수 있을 때 미리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는 독서모임에 가입했다. 결혼을 하려면 연애를 해야 했고, 연애를 하려면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30대 직장인이 자연스레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모임밖에 없어 보였다. 헬스, 등산, 세차, 코딩, 보드게임 등 다양한 주제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중 하필 독서모임에 가입한 이유는 내 유일한 취미가 독서였기 때문이다.


모임에 가입한 후로는 열심히 책을 읽고, 정기모임이 열리면 빠짐없이 참석했다. 참석할 때면 나름의 대본까지 준비해서 갔다. 아무리 연인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필요 이상으로 발톱을 드러내는 건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모임에 들어갔으면 모임 취지에 맞는 활동부터 집중하는 게 맞다고 봤다. 그렇게 수개월동안 열정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어느 날 운영진 제안이 들어왔다(거의 반협박에 가까운). 귀찮을 것 같았지만 재밌을 것 같기도 했다. 운영진이 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모임이 열릴 때 가벼운 진행 정도만 하면 충분해 보였다. 그래서 수락했다.


근데 이왕 감투를 쓴 김에 작은 소동(?)을 벌이고 싶었다. 딱딱한 분위기의 정기모임 말고, 좀 더 자유로운 토론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소모임을 꾸리면 좋을 것 같았다. 왠지 독서열정이 남다른 내가 주최하는 모임이라면 참여자도 많지 않을까 싶었다. 인원제한을 둬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김칫국을 사발째로 들이마실 정도였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정기모임보다도 더 알차게 준비한 소모임이었지만, 참석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어쩌면 난 대화를 나누기에 가장 부담스러운 사람 중 한 명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그런데 거의 막바지가 되어서야 딱 한 명이 참석의사를 밝혔는데, 그게 바로 지금의 아내였다.




정기모임이든 번개모임이든 모임 전날까지 참석자가 없거나, 참석자가 한 두 명에 그치면 대개는 파토가 나기 십상이다. 하지만 난 참석자가 없어도 끝까지 마음을 접지 않았고, 처음 보는 사람과 뻘쭘하게 시간을 보내게 되더라도 모임을 진행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혼자 알차게 준비한 것들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토론할 주제도 고심해서 정했고, 오는 분들에게 나눔 할 책도 준비했었다. 그러니 고작 참석자가 한 명뿐이라는 이유로 허무하게 접긴 싫었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그녀와 난 단 둘이서 마주하게 되었다.


근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분명 그날 그 자리는 건전한 독서토론을 위한 자리였지만, 단 5분 만에 독서모임을 빙자한 소개팅이 되어버렸다. 평온한 마음을 가지기엔 그녀가 너무 이뻐 보였기 때문이다. 똑단발에 양쪽 귀엔 작은 고리 모양의 금귀걸이가 걸려 있었고, 곰돌이 모양의 금목걸이가 돋보이게끔 목 주변과 쇄골이 훤히 드러난 린넨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빨간 매니큐어를 칠했는지 열 손가락은 새빨갰으며 피부가 고왔다.


반면에 그녀는 날 처음 봤을 때 못 생겨서 실망했다 하였다(사귀고 나서야 들은 충격적인 얘기였다!). 더불어 소개팅으로 알게 된 남자와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도 하였다. 순간 멍해질 정도로 절망스러웠으나 일단 해야 할 건 해야 했으니, 멘탈 부여잡고 준비한 모임이나 진행했다. 원래는 두 시간 정도의 모임이었는데 그날 우린 세 시간을 쉬지도 않고 떠들어 댔다.


그 후 난 한 달 동안 그녀에게 치근덕(?)거렸다. 날 전혀 남자로 보지 않는 눈치였지만,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싫어하진 않아 보였다. 알고 보니 그녀는 직접 벌어 모은 돈으로 34평 아파트를 사서 혼자 살고 있었고(갚아야 할 대출금도 얼마 되지 않았다), 직장도 좋았다. 그런 그녀에 비해 가진 건 쥐뿔도 없었으니 주눅이 들 법도 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현실이 각박해도 여전히 진심이 통하는 세상이라고 믿었기에.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드러내고자 했다. 느닷없이 좋아한다며 들이대는 건 취향도 아니었으며, 고백하는 남자가 취할 수 있는 최악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녀와 난 소개팅처럼 사귀는 걸 전제로 만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나라는 인간을 최대한 보여줄 수 있을 만큼 보여주는 것이, 그나마 그녀와 나의 인연이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전략일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내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당당했기 때문이다. 또래에 비하면 이룬 것도 가진 것도 현저히 부족했지만, 난 그동안 결코 대충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눈에 띌 만한 무언가를 쥐고 있지 않다고 해서 지난날들이 의미없는 건 아니었다. 도전하는 일마다 예기치 못한 변수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해 여전히 방황하는 중이긴 했어도, 그러한 과정들을 거침으로써 스스로 조금씩 정제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연애를 거듭할수록 괜찮은 사람이 되어왔던 것처럼.




그녀를 스치는 바람에 나를 조금씩 묻히는 전략이 먹혀들었는지, 극적으로 그녀는 결국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다. 사실 그녀를 만나기 이전에 겪었던 다섯 번의 연애사에선 상대방의 마음을 얻고자 그토록 오랜 기간 애를 써봤던 적이 없었다. 그만큼 포기하고 싶었고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근데 그런 것치곤 우린 마치 원래부터 결혼할 사이기라도 한 것처럼 죽이 잘 맞았다. 사귀자마자 동거를 시작하고, 1년도 되지 않아 결혼을 약속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종의 법처럼 여기는 사회적 통념은 가능한 한 따르지 않았다. 돌잔치홀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각방을 쓰고, 중고차를 사고,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지 않는 등 우린 우리가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삶을 꾸려갔다.


굳이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는 결혼의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생각하는 결혼의 본질은 '서로 잘 지내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게,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할 일은 없지만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더 잘 살기 위해서 결혼한 거니까.


난 누군가가 내게 축복을 내려줄 때까지 기다릴 마음이 없었다. 내가 누려 마땅한 축복이 있다면 먼저 나서서 찾아내거나, 없다면 스스로 만들어라도 내는 것이 나의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을 사랑하고 기꺼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는 나밖에 없었다.




결혼은 선택의 문제라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내가 결혼 후에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그럴 거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다만 결혼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사람, 배우자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사람, 보편적인 결혼문화를 따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혹시나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책을 쓰게 되었다.


우리 부부만의 독특한 이야기가, 부디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는 이들에게 유의미한 응원이 될 수 있기를.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드디어 저의 첫 에세이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의 펀딩을 시작했습니다. 결혼의 본질인 '서로 잘 지내는 것'에 초점을 맞춘 저희 부부만의 독특한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결혼을 맘에 품고도 망설이거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지향하는 분들에게 추천드리며, 또 그런 분들에게 선물하기도 좋은 책이에요. 후원자분들에게는 온/오프라인 북토크 참여권을 무료로 드리고 있으니 많은 후원 부탁드릴게요 :)


(p.s 여러분들 덕분에 별 볼 일 없는 제가 감히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빌어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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