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힘들수록 한 걸음씩

ep 23. 쓰고 지우고를 무한반복했더니

by 달보


약속 날짜에 맞춰 최종 원고를 넘기기 위해 브런치 연재를 중단했더니 확실히 여유가 생기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갈 길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생애 첫 책이라 신경이 쓰여서 그런지 속도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시간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한 달도 넉넉하진 않았으나 두 달은 너무 늘어질 것 같길래 한 달 안에 원고를 넘기겠다 한 건데 괜히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는 시간의 대부분을 탈고에 투자함에도 직장 생활과 병행하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카페서 글 쓴답시고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불러오는 아내를 혼자 두는 것도 마음이 쓰였습니다.


아내는 그런 제 속내가 훤히 보이기라도 했었나 봅니다. 어느 날 슬쩍 다가와서는 뱃속의 애기가 나오면 당분간은 지금처럼 글을 못 쓸 수도 있으니 자긴 걱정 말고 쓸 수 있을 때 실컷 쓰라며 저를 다독여줬으니 말입니다. 참 고맙고도 미안하면서 동시에 위안이 되고 용기가 샘솟는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버겁기만 한 갖가지 요소들이 어깨를 짓누르긴 했지만, 글쓰기를 발견하게 도와주고 매번 편의를 봐주는 아내를 봐서라도 독해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희한하게도 그 이후로는 탈고에 불이 붙는 듯했습니다. 마감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며 걱정할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쓰고자 애를 썼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정해진 시간에 노트북 앞에 앉아만 있자고 저 자신과 타협했습니다. 완벽하진 못할지언정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끝까지 해보자며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집중이 잘 되는 카페에서 글을 쓰느라 온종일 집 밖을 나돌면서 말입니다.




느닷없이 시작한 찬물샤워가 많은 도움이 됐었습니다. 원래는 새벽에 일어나면 양치하고 세수하거나 혹은 머리를 감으며 잠을 깨우곤 했습니다. 근데 그 정도로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졸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에 비해 잠이 덜 깬 몽롱한 상태로 다짜고짜 온몸에 냉수를 들이붓는 건 얼굴에 물 좀 묻히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잠이 달아나는 수준을 떠나 정신이 번쩍 들고 온몸에 활력이 돌았습니다. 이젠 새벽 일찍 일어나 찬물샤워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으면 찝찝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효과가 좋았습니다.


매일 매 순간이 소중한 기회라는 걸 상기하고자 했습니다. 힘들어도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지 않고 버텼더니 어떤 식으로든 글이 써지긴 했습니다. 한 꼭지를 다 쓰고 보면 내용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최소한 멈춰 있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 있단 것에 중점을 뒀습니다. 그렇게 쓰고 지우고를 무한반복했더니 결국엔 마감까지 보름을 남기고 목표 분량을 다 채울 수 있었습니다. 남은 건 최종적인 퇴고를 거치면서 글의 분위기를 통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앞선 글에서 언급하긴 했습니다만, 탈고하는 게 유독 힘들었던 이유는 투고하면서도 쉬지 않고 글을 썼더니 그 와중에 제가 많이 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간 계약 직후 한 달 만에 들여다본 원고는 이미 숱한 퇴고를 거친 것이었음에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엔 최선의 글이었을진 몰라도 나중에 다시 보니 최선이라 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글이었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그만큼 성장한 거라 여길 수도 있지만, 문제는 주어진 시간 안에 작업을 끝낼 수 있을지였습니다.


그런 만큼 추후에 보충한 글은 기존 원고와 분위기가 많이 달랐습니다. 거의 다른 사람이 썼다 해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새로이 글을 쓰는 내내 이질감이 들긴 했어도 이전 글에 묻어있는 결과 맞출 순 없는 노릇이었습니다(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했을 테지만). 그건 곧 스스로 퇴보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까요. 고로 전체의 30%에 지나지 않는 새로운 글과 궤를 맞추기 위해 나머지 70%, 즉 기존 원고를 싹 다 뒤집어엎어야만 했습니다. 그럼 마감을 맞추지 못할 게 뻔해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놔둘 수도 없었기에 마감을 코앞에 두고 원고를 새로 쓰는 듯한 느낌으로 퇴고를 해나갔습니다.

keyword
이전 22화브런치를 접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