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4. 한 인간이 깊어지는 과정
탈고에 박차를 가하며 매 꼭지를 다듬을 때마다 항상 두 가지 생각이 번갈아가며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이미 수없이 고쳤는데도 이 모양 이 꼴이라니'라는 생각과, 다른 하나는 '그새 글 보는 눈이 정말 많이 변했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더불어 '이렇게 다듬어도 또 지나고 보면 형편없어 보이겠지'라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그건 애써 무시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얽매이기 시작하면 진행 자체가 안될 것 같았거든요.
나름 정성 들여 쓴 글이 시간 좀 흘렀다고 그새 못나 보이는 게 혹시 기분 탓일까도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저는 출간 계약 후 기존 원고를 복사해 새로운 버전으로 작업하고 있었습니다(처음부터 계획했던 건 아니고 퇴고하다 보니 고칠 부분이 너무 많았던 관계로).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기존 원고와 새 원고의 격차가 격차가 돋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확실히 예전 원고는 설명이 부족하고, 강압적이었으며, 내용전개도 뒤죽박죽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다른 작가님들의 글에서 제겐 없는 친근함을 탐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딱히 그럴 만한 계기는 없었음에도 유독 유쾌하고 친절한 매력이 돋보이는 분들의 글이 눈에 밟히곤 했습니다. 그만큼 제 글이 더욱더 무미건조해 보일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희한한 건 그런 작가님들처럼 유해지고 싶단 마음을 품은 채로 글을 쓰니까 필체가 조금씩 변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평소에 읽고 쓰기를 게을리했다면 그마저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했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인데, 그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꾸준히 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데 꾸준히 쓰려면 그만큼 또 많이 읽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많이 읽고 쓰다 보면 그러고 싶지 않아도 오만가지의 사유를 거치게 됩니다. 경험상 성장은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서서히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단언컨대 글쓰기는 한 인간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모든 요소를 안고 있다고 봅니다. 제가 글쓰기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그나저나 퇴고하는 중에 완전히 지우지 않고 남겨 놓은 글 덕분에 의외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보통 글을 쓰다가 문단 단위로 수정해야 할 때는 혹시 몰라서 따로 빼두는 버릇이 있습니다. 당장엔 이상하게 보여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다시 보면 오히려 고쳐 쓴 것보다 괜찮을 때가 종종 있더라고요. 그런 이유로 브런치북 정도의 큼지막한 글을 다 쓰고 나면 잉여글이 꽤 쌓여 있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설마 퇴고 중에 지우려다 만 글에서 일부를 가져다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용과 내용 사이를 이어 붙일 만한 살이 없거나, 추가로 보충할 만한 글이 떠오르지 않을 때 한쪽으로 치워둔 글을 뒤져보면 쓸만한 것들이 꽤 많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탈고를 향한 여정은 점차 순조롭게 흘러갔습니다. 한참 몰입해서 글을 쓰다가도 도중에 찬찬히 훑어보면 제가 쓴 것치곤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루종일 노트북 앞에 틀어박혀 있는 게 결코 쉽진 않았으나 그만한 보람은 항상 따랐습니다. 물론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또 이상하게 보이겠지'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올라오긴 했지만 아무렴 어떨까 싶었습니다. 어차피 모든 걸 통제할 순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전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런 자세야말로 모든 상황을 막론하고 최선의 태도라 믿었으니까요.
걱정만큼 심각한 일이 현실에 잘 없듯,
우려했던 것치곤 모든 게 다 좋았습니다.
마감이 코앞에 닥친 것만 빼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