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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Sep 28. 2024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잠시 잊고 있었다

뜻밖의 고향 방문


요즘 두 달 된 아이를 키우느라 잠을 못 자서 그런지 평소 감정 기복이 없다고 자부하는 나인데도 기분이 꽤 자주 오락가락(?) 한다. 여러 모로 예민해진 것 같다. 스스로 '예민하다'라는 말 자체를 떠올린 적이 거의 없었던 거 같은데. 요즘 내 표정은 태생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라 오해받아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쌩뚱한 모양을 자주 짓는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된 기쁨도 잠시, 최근 들어 환하게 웃어본 적이 의외로 별로 없는 것 같다. 추석이 지났는데도 눈치 없이 여전히 습한 날씨처럼 내 마음도 참 찜찜하기 그지없다.


어느새 4년이 넘게 치아교정 중인 난 3주마다 치과를 간다. 매번 40분 거리에 있는 대구까지 가야 한다. 3주가 그리 짧은 간격은 아닌 것 같은데, 어? 하면 다음 날 치과 오라는 예약 문자가 알림에 떠 있었다. 본 글을 쓰고 있는 2024년 9월 21일은 치과 방문이 예약된 날이었다. 안 갈 순 없지만, 참 가기가 싫었다. 아이는 1,2시간 간격으로 칭얼대는데(안아주지 않으면) 모유수유까지 하느라 고생하는 아내를 집에 두고 집 밖을 나가는 게 영 내키지가 않았다. 물론 옆에 버티고 서 있는다고 해서 도움 되는 건 딱히 없지만, 그럼에도 그냥 함께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어느새부턴가 몸에 스며 있었다.


그런 무거운 마음을 안고 치과를 다녀오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지하주차장을 나서고 보니 더운 날씨를 끝내려는 듯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로에 차가 별로 없어서 운전하기엔 좋았다. 희한하게도 비 오는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일에 대구 가는 것보다 10분 정도나 일찍 도착했다. 잘못 걸리면 한 시간 넘게 기다릴 때도 있는(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치과에서도 첫 순서로 진료를 받기도 했다. 웬일인가 싶었다.


'운수 좋은 날'이라는 말이 뇌리를 스치는 찰나에 갑자기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할머니 생일이 며칠 뒤던데 대구 간 김에 얼굴이라도 보고 오지?"


아내의 말을 듣자마자 드는 생각은 '아, 가기 싫은데..'였다. 난 생일이라고 해서 찾아가거나 선물을 드리거나 하진 않는다. 어릴 때부터 생일을 챙기지 않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탓도 있고, 기념일 자체를 별로 특별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다. 그래서 영 내키지가 않았다. 여태 아내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은 거의 없었기에 아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긴 했는데, 그럼에도 계속 머뭇거리게 되었다.


"흠, 다음 달에 볼 건데 가야 할까?" 

"여보가 한 번 생각해 봐유."


전화를 끊은 후에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가지 않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대신 전화만 한 통 하기로 했다. 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할매, 이번 주 생일이라 캐서 전화 한 번 해봐따."

"아이고, 음력 생일이라 기억하기 힘들었을 텐데 우예 알았노."

"아, 와이프가 알ㄹ... "


"정치호 님~"

안내 데스크에서 내 이름을 호명했다.


"할매! 조금만 있다가 다시 전화하께!" 

치과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전화했다. '생일이라서 전화 한 번 해봤다'라는 말만 건네고 방향을 집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어, 할매. 갑자기 이름이 불리가 이제 막 진료받고 나왔다."

"그래, 그래서 할매집에 들른다고?"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차마 "아니, 그냥 생일이라 전화 한 번 해본 거고 할매집엔 나중에 가께."라는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획을 틀었다.


"아.. 어어. 잠깐 들릴게."





그렇게 아내 덕분에 오랜만에 예전에 살던 동네를 오래간만에 찾게 되었다. 30년 넘게 살던 동네였지만, 이젠 꽤나 낯설어진 그 동네. 근처 다른 곳들은 아파트 재개발로 인해 예전의 허름한 모습이라곤 온데간데없이 삐까뻔쩍한 건물과 상가들이 즐비한데, 유일하게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한 낡은 동네. 그 동네를 가는 동안 약간 복잡한 머리에 비해 몸은 편했다. 안 본 사이 부쩍 단속 카메라가 많아진 탓에 속도만 조금 신경 썼지, 나머지는 손과 발이 지맘대로 움직여 나를 그 동네로 데려가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이지만 예전 집 가는 길은 여전히 익숙했다.


그런데 집에 거의 다와가고 있는데, 순간 아차 싶었다. 삽시간에 후회가 밀려왔다. 이전에 아내가 할머니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오라 했을 때, 왜 차마 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었는지가 일순간 명확해졌다.


난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가 살고 있으며 꼬박 30년을 넘게 자라온 동네이지만, 난 그곳이 싫었다. 그곳 근처만 가도 인생이 점점 꼬이기만 하던 불과 몇 년 전의 기운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좁은 골목, 전봇대 근처 널브러진 쓰레기들, 인사해도 더 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존댓말과 경계심이 깃든 눈초리로 응수하는 동네 할머니들, 옛날엔 부잣집이었으나 이젠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 등. 할머니집에 가까워질수록 '이전'으로부터 겨우 벗어나 이제 막 숨통이 트인 내 삶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괜히 왔나 싶었다. 평온했던 마음이 난데없이 우중충한 날씨와 눈이 맞아 살림이라도 차린 듯 어지러워졌다.


그렇게 착잡한 심정으로 할머니집에 들어가 할머니를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안 본 지 몇 달 만에 살이 쏙 빠져 있었다. 여름이라 덥기도 덥고, 팔이 수술해야 될 정도로 많이 아팠던 게 이유라고 하셨다. 지금은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지긴 했는데, 머리를 혼자 힘으로 감지 못해서 근처 사는 이모가 일주일에 몇 번씩 감겨 준다고도 했다. 평소 걷기 운동을 열심히 하셔서 그런지, 아프단 소리만 안 했으면 누가 봐도 정정하게 볼 법도 했다.


얘기를 들으면서 할머니의 나이를 떠올려 봤다. 40년생이시니까 85세쯤 되셨다. 가끔 난 혼자서 죽어도 괜찮은(?) 나이를 상상하곤 그게 바로 85세였다. 새삼 할머니의 나이가 확 와닿았다. 그런 홀쭉해진 할머니 앞에 있다 보니 눈물이 차올랐다. 꾹 참아야 할 정돈 아니었는데, 언제든지 곧 흘러내릴 준비라도 된 것마냥 눈물샘 공장이 한참 가동 중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태 장례식을 가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나였다. 근데 할머니는 살이 좀 빠졌다는 이유로 이리 먹먹해지는 걸 보니,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벌써부터 감당하기가 상당히 힘들 것만 같았다.


근데 그것도 잠시, 곧이어 할머니는 나의 부모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턴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이전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1분 1초라도 더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졌다. 여전히 가난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생각이 1도 없어 보이는 지긋지긋한 부모님 얘기를 듣다 보니, 또 부글부글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부모님집은 할머니집 바로 옆에 있었다. 또 할머니를 만나고 있을 때에 집에도 계셨다. 하여 이까지 온 김에 얼굴이라도 비추고 가려했으나, 할머니에게 근황을 듣다 보니 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이따가 집으로 가면 칭얼대는 아이까지 봐야 하는데, 멘탈이 부서진 채로 돌아갈 순 없었다(이미 많이 어그러진 상태였지만). 그래서 할머니에게는 내가 왔단 건 비밀로 해달라 부탁하며, 곧장 부모님집을 지나쳐 바로 구미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이곳에 다신 들리진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나마 괜찮았던 멘탈이 예정에 없던 할머니집을 들리게 되는 바람에 무너지니까, 괜히 날 부추긴 아내가 살짝 밉기도 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사실 최근 들어 정신 상태가 많이 해이해졌었다. 글쓰기도 잘 안 되고, 육아도 집중 못하고, 아내한테도 소홀했다. 그 무엇 하나도 옳게 챙기지 못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마치 심심한 슬럼프에 빠지기라도 한 것 마냥.


그런데 이날의 '뜻밖의 고향 방문'은 나로 하여금 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내가 지금의 풍요를 누리기 이전에 어떤 세상에 살고 있었는지를 상기시켜 준 좋은 계기가 되었다.


역시 아내 말 들어서 손해 볼 건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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