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여부는 유대감이 결정한다
난 원래 아기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무조건 갓난아기라고 다 귀여워 보이는 것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조카들에게도 시큰둥했다. 싫은 것까진 아니지만 막 관심이 가질 않았다. 놀아주고 싶지도, 뭘 선물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가끔 어린아이들이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자녀계획이 없는 건 또 아니었다. 과장을 좀 보태면 난 태어나면서부터 결혼을 결심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어릴 적부터 가정을 꾸려야겠단 생각이 확고했다(별다른 계기는 없었다).
공부와 담을 쌓다가도 그나마 시험기간에 벼락치기라도 했던 건, 쉽고 편한 직장에 취직할 수도 있었지만 기어코 힘든 일을 배우려 제 발로 찾아갔던 건, 대충 살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지만 매 순간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읽고 쓰며 부단히 노력했던 건, 한 여자의 다정한 남편이자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무탈하게 해내기 위해서였다. 단언컨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나를 몰아세우며 살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결혼해서 애까지 낳아 잘 살아보겠다면서, 정작 아이들한텐 일말의 눈길도 가지 않는다는 게 내가 봐도 참 아이러니하긴 했다. 그런 나여서 그런지 다음과 같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내 아이에게도 감정이 안 생기면 어떡하지.'
에이 설마 진짜 그럴까 싶으면서도, 그동안 어린애들을 대면할 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았다. 하여 마냥 안심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자녀계획을 포기할 정도로 그 부분을 쓸데없이 부풀려가면서까지 염려하진 않았으나 잊을 만하면 종종 생각날 정도는 됐었다.
그나마 기댈 수 있었던 건 내 안에 흘러넘칠 정도의 많은 사랑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자부할 수 있는 나름의 근거는 4살 터울의 동생을 한없이 아끼고 보살폈던 기억과, 지금의 아내에게 무한한 사랑을 퍼 나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이나 세상에서 내 여동생과 아내밖에 모르는 나의 남다른 사랑을 훗날 만나게 될 나의 주니어에게도 쏟아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미세한 불안감은 완전히 가시질 않았는데, 그 상태로 난 2024년 7월 10일에 나와 아내의 DNA를 물려받은 새 생명을 마주했다. 그 당시의 심정을 솔직히 말하면 '신기하다', '얘는 누굴 닮은 거지'라며 생각한 게 전부였다. 티비 속 드라마에서 혹은 먼저 아빠가 된 친구들에게서 들었던 경험담과는 달리 막 감동하거나, 가슴이 뛰거나, 신이 날 정도로 기쁘지 않았다. 난 원래부터 좋은 일을 마주하든 나쁜 일을 마주하든 크게 동요하지 않는 편이긴 했는데, 생애 처음으로 자식을 대면할 때마저도 무덤덤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기분이 좋기는커녕 오히려 약간 당황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아내는 성공적인 모유수유를 위해 조리원에서도 24시간 모자동실을 했다. 그때 온종일 옆에 붙어 있으면서는 조금씩 갓난아기에게 정이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빠는 처음이라 대체 왜 우는지 영문도 모르고 쩔쩔매면서 밤을 꼴딱 새우는 바람에 짜증도 좀 부렸지만, 그러면서 정이 붙는 게 체감됐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날은 우리 아이가 태어난 지 38일째 되는 날이다. 처음과 비교하면 지금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사랑스럽고 귀엽다. 아이와 함께하는 다가올 미래가 기다려질 정도로 뭔가 묘하면서도 좋은 기분이 온몸에, 아니 온 세상에 고루 퍼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한 달 새 정이 꽤나 많이 든 모양이다.
난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족을 가족처럼 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와 핏줄이 섞인 관계라고 한들, 그 사이를 잇는 유대감이 없으면 딱히 특별하게 생각지 않는 편이다. 데면데면한 관계는 그냥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만다. 부모라고 해서, 형제라고 해서, 친척이라고 해서 살갑게 굴 생각은 없다. 마음에서 차오르지 않는 감정을 애써 창조하면서까지 지낼 필요는 없으니까. 그럴수록 나는 옅어질 테니까.
가족을 대하는 자세가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족들 사이에 일어나는 별의별 일들을 다 겪다 보니, 어느새 가족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지금처럼 변해 있었다. 근데 우리 아이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와 처음 마주했을 때, 단지 내 아들이라는 사실만으로는 마음이 그리 흔들리지 않은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한 달이 넘도록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저귀를 갈며 노오란 단호박 샐러드(응아)를 처리하고, 그 좋아하던 글쓰기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옆에 찰싹 달라붙어 온종일 우는 거 달래고, 제발 잠 좀 자라며 평생 몇 번 해본 적도 없던 기도를 맘 속으로 되뇌다 보니, 아이와 나 사이에 '유대감'이라는 게 생겨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걱정했던 것만큼 애정이 안 생기진 않아서. 혹시 우리 아이한테도 평소 바깥에서 다른 애들이 지나갈 때 무심코 쳐다보듯 할까 봐 불안했었는데, 또 그건 아니니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내가 우리 아이를 바라보며 느끼는 사랑에 가까운 감정은 저 생명이 내 아이라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한 달 남짓한 함께 한 시간들이 누적되어 생겨난 것이리라.
비록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을 가족 취급할 생각이 전혀 없는 만큼 냉정하다며 손가락질받아도 할 말은 없다만, 그럼에도 일말의 유대감도 없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마음에도 없는 관계를 유지할 마음은 아직까진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가족이란 것도 어찌 보면 실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개념에 불과하지 않을까. 피가 섞이지 않아도 한 지붕 아래 부대끼며 오랜 시간 함께 살다 보면, 실제 피가 섞인 형제가족보다도 훨씬 더 애틋하게 지낼 수 있는 사례가 천지에 널린 걸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고로 난 우리 아이를 대할 때 내 아이라는 '사실'보다는, 그 아이와 함께 쌓아나갈 '과정'에 더 집중하려고 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관계이니만큼 그 관계를 형성하는 독보적인 유대감만이 우리 사이를 보다 이롭게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