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발이라 오히려 좋아

평발인 덕분에 얻은 것

by 달보


난 평발이다. 정확히는 반평발이다. 뭐, 평발이라고 해서 딱히 불편한 건 없다. 가끔 가볍게 걸을 뿐이지 무리하게 오래 걷거나 특히 뛰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평발이라는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 내가 평발의 심각성을 느낀 건 군대에서였다. 훈련병 시절 15km 행군을 할 때였다. 행군이 힘들다며 각오 단단히 하라는 교관의 말이 실감이 잘 나지 않아서 별로 크게 걱정한다든지 지레 겁먹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런데 행군을 시작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발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당시 주변을 걷고 있던 동기들은 아직까진 발 상태가 괜찮은 것 같았다. 보아하니 내가 평발이라 물집이 좀 일찍 잡힌 듯했다.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한참 남았는데 물집의 범위가 서서히 넓어짐과 동시에 고통도 함께 커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포기하긴 싫었다. 끝까지 걸어간다고 해서 큰 상을 받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끝까지 가고 싶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선택한 방법은 '정면돌파'였다. 정면돌파라고 해야 할지 무식하다고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난 물집을 지그시 밟기 시작했다. 물집에서 오는 고통도 상당했지만 그 고통을 피하느라 발걸음이 이상해지는 바람에 더 불편하고 아픈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어중간하게 하지 말고 하나라도 취하잔 심정으로 물집을 대놓고 눌러 뭉갠다는 마음으로 물집이 잡히기 전보다 되려 더 힘차게 땅을 박차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소리도 나오지 않을 만큼 아팠다. 찌르는 고통이 온몸에 전기처럼 흘렀다. 그렇다고 물러서면 이도 저도 안될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쌔게 밟았다. 아예 그냥 터져버리라는 심정으로, 잡히지 않는 모기 한 마리를 잡으려 방 안을 에프킬라로 가득 채워 니가 죽나 내가 죽나 하는 것과 비슷한 각오로 물집을 작살냈다. 못 걷겠다고 말하기 전에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일단 해보려는 심산이었다.


한 10분 정도 흘렀을까. 어느새 발 상태가 평온해진 느낌이 들었다. 마비가 된 건진 모르겠지만 아프지가 않았다. 오히려 고통을 감수한 대신 굳은살이라는 보상이 내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발바닥에 보호막이라도 생긴 것만 같았다. 그때 걷느라 지쳐가는 동기들 사이에서 남모를 희열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의 경험은 이후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나를 가로막는 무언가가 나타나더라도 일단 부딪혀 보고 상황을 판단하는 용기. 그건 나를 나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 꽤나 쏠쏠한 자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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