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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Oct 21. 2024

100일 된 아이와 백화점 나들이

아빠가 된 후에야 와닿게 된 사자성어


태어난 지 100일 하고도 겨우 3일을 넘긴 현이와 처음으로 대구에 있는 신세계 백화점을 찾았다. 내가 살고 있는 구미에서는 1시간 정도 거리여서 되도록이면 갈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전 100일 기념으로 동생이 현이 내복을 사줬는데 현이가 개월 수에 비해 상당히 똥똥(?)해서 사이즈 교환을 위해 들른 것이었다. 백화점 같이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걸 선호하진 않지만 뜻밖의 방문에 은은한 설렘을 느꼈다.


비 오는 주말에다가 하필 점심시간 때 들러서 주차장부터 차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겨우 주차를 끝내고 안에 들어가니 확실히 사람들이 많았다(사실 대구 신세계백화점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지만). 근데 그중 눈에 가장 많이 들어온 건 여태껏 단 한 번도 관심 있게 본 적 없는 것인데, 그건 바로 유모차였다.


세상에 백화점에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막상 내가 유모차를 밀고 있으니 눈 돌리는 곳마다 유모차를 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와중에 곁눈질로 유모차 비교도 하면서.


아내와 둘이서 백화점에 들를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육아용품 매장이 즐비한 곳 근처를 유유히 걸어 다니는 것. '육아휴게실'이라는 명판이 붙은 곳에 있는 수유실에 들린 것. 안 그래도 사람들 많은 곳에 가면 기가 쉽게 빨리는 편인데 발걸음 하는 곳마다 아이들까지 북적거리고 있으니 정신이 없었다. 우리 현이 울음소리가 나름 강한 편인 줄 알았는데 막상 '필드'에 나가 보니 아니었다. 현이보다 대단한(?) 애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한편 유모차를 거칠게 모는 이들이 많았다. 한 번은 매대를 구경하고 있는 아내 뒤에서 유모차를 잡고 서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아내 옆으로 한 여자가 비집고 들어오더니 뒤이어 그 여자의 남편이 유모차를 앞세워 내게 돌진하듯 향했다. 순간 본능적으로 현이가 타고 있는 유모차를 뒤로 잡아끌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충돌했을 것이다.


또 한 번은 육아휴게실에서였다. 처음 들어갈 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진 않았는데, 아내가 모유수유를 마치고 나갈 때는 유모차가 바깥에 줄 지어 있을 정도로 사람들로 터져나갈 듯했다. 볼 일 다 본 나와 아내는 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우리 뒤에 있던 어떤 여자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거의 유모차를 비비듯이 가깝게 따라붙었다. 안 그래도 현이를 유모차에 앉히고 있을 때 굳이 밀치고 들어올 때부터 낌새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결국 아내와 부딪히고야 말았다.


한 번도 아니고 연이어 유모차를 끌던 사람들과 마찰이 생기니까 급격하게 피곤해지면서 당장에라도 집에 가고 싶어졌다. 오래간만에 백화점 나들이에 들뜬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오늘 백화점에 있는 동안 일전에 읽었던 김영하 작가님의 <오직 두 사람>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그 책을 읽어보면 작은 이야기들이 여럿 실려 있는데 그중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한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그 부부는 아이와 함께 마트에 들른다. 중간에 아내는 화장실에 가고 아이는 남편이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아이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후 두 사람의 일상은 완전히 파괴되고 아내는 정신병에 걸리게 된다. 먼 훗날 극적으로 잃어버린 아이를 다시 만나긴 한다. 하지만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법한 결말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처음 그 이야기를 접했을 땐 감정이입이 그리 되지 않았다. 아이를 잃어버리는 과정이 다소 억지스러워 보여 그런 것도 있지만, 아이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고통이 당최 어떤 건지 가늠되지가 않았다. 밝은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재밌게 읽어 나가긴 했다만 감정의 동요는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100일 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백화점을 돌아다니다 보니 김영하 작가님의 책이 자꾸 생각났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어렴풋이 공감을 하기 시작했다. 앞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얼마나 가슴이 무너졌을지. 그러면서 유모차 손잡이를 잡은 손에 괜히 힘을 주거나 유모차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등 아내 몰래 소소한 이상증세(?)를 띠기도 했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만약 오늘 같이 백화점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아이를 잃어버리면 과연 내 일상은 얼마나 망가지게 될까. 아내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따위의 생각들을 하다 보니 '이혼', '정신병', '파멸' 등 떠올려서 좋을 게 없는 단어들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역지사지(易地思之)'까지도.


만약 그런 일이 내게도 일어난다면 그 어떤 비극이 따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만 같다. 백화점을 거닐던 내내 울지도 않고 점잖게 유모차에 앉아있던 작은 생명은 나와 아내에겐 이미 그만큼의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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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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