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샤워를 하다가 문득
퇴근 후에 여느 때처럼 아이를 씻긴 후 나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원래 같으면 온도 레버를 'C'까지 틀어서 가장 차가운 물로 짧고 굵게 샤워를 했을 텐데 문득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안 그래도 아이를 씻기느라 보일러도 '목욕' 모드로 되어 있었다. 온도 레버를 'H'와 'C'의 중간쯤에 위치하게 돌리니 금세 따뜻한 물이 뿜어져 나와 온몸을 적셨다.
눈을 감아 보면,
내게 보이는 내 모습.
지치지 말고,
잠시 멈추라고.
갤 것 같지 않던,
짙은 나의 어둠은.
나를 버리면,
모두 갤 거라고.
수건 옆에 놓아둔 아이폰에서 '어른'이라는 노래의 후렴구가 들려왔다. 가수 손디아가 부른 드라마 <아저씨>의 OST 수록곡인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다. 한때는 한 곡 반복으로 듣다가 최근엔 들은 적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뜨거운 물을 온몸으로 적시던 찰나에 그 노래가 우연히 들려왔다.
그 상태로 노래가 끝날 때까지 계속 있었다. 샤워기에서 내리는 따뜻한 물과 옆에서 들려오는 음악이 마치 나를 위로라도 하는 것 같았고 난 꼭 위로를 간절히 바래왔던 사람처럼 눈을 감고 고개를 슬며시 든 채로 서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찬물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 놔두고 굳이 그랬던 이유는 게을러빠진 나 자신을 바로 잡기 위해서였다. 새벽기상의 관건은 잠을 깨는 것이었다. 알람 듣고 일어나는 건 쉬웠지만 일어났다가 다시 잠드는 걸 막는 게 난 가장 어려웠다. 그래서 찬물로 온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세수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정신이 들긴 했지만 찬물샤워만큼의 효과는 없었다. 퇴근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온종일 회사에서 일하고 집에 가면 축 처지기 마련인데 찬물로 몸을 적시면 자기 전에도 조금 더 글을 쓰고 잘 수가 있었다. 근데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정말 그렇게까지 나를 몰아세워야만 했던 걸까.
생각할수록 난 내게 너무 모질게 굴었다. 물론 명분은 있었다. 부모님처럼 살기 싫었으니까. 나와 남은 평생 함께 하기로 약속한 아내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생명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재주를 겸비해야만 하니까. 그럼으로써 당당하고 자유롭게 그리고 정직하게 살고 싶으니까. 하지만 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모든 건 결국 나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만으로 잠이 달아나지 않으면 한 술 더 떠 차디찬 물로 새벽 달밤부터 몸을 혹사시킬 게 아니라 그런 날은 좀 더 쉬면 어땠을까. 남들 다 자는 시간에 혼자 일어나서 글을 쓰고 회사에서 온종일 일도 하다 왔으면 저녁만큼은 좀 따뜻한 물로 포근하게 몸을 적셔도 되지 않았을까.
오늘따라 내게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