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나를 스쳐 지나간 다섯 명으로부터
한날 본사로부터 이틀 동안 관리자 교육을 듣고 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안 그래도 최근 들어 일거리도 별로 없거니와 사무실에만 있기 갑갑하던 참이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낯선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교육을 듣게 되었다.
평소 사람들 많은 곳을 잘 가지 않아서 그런지 수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게 뭔가 기묘하고도 신선했다. 훑어보니 내 나이는 강연장에 모인 사람들 중 평균쯤에 수렴하는 듯했다. 다들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일까.
뭐, 대충 예상은 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 사람, 고개를 떨궈 폰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 엎드려 자는 사람, 뭔가를 계속 끄적이고 있는 사람 등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진중한 자세로 열심히 교육을 듣는 사람은 몇 없었다. 강사님은 그런 현장 분위기가 꽤나 익숙한 듯했다. 하긴 자거나 폰 보는 것 정도는 요즘 세상에선 보통의 일이긴 했다.
와중에 인상 깊었던 사람이 두 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은 교육 중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더니 폰을 갓난아기 감싸듯 두 손으로 거머쥔 채 후다닥 강의장 밖으로 나갈 때 내 눈에 들어왔다. 급한 전화가 왔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잠시 후 등 뒤에서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느닷없이 날아와 내 귀를 때렸다. 앞에서 마이크 잡고 열심히 떠들고 계시는 강사님보다 더 크게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전 후다닥 나간 사람이 딴에 매너는 지킨답시고 강연장을 나가 전화를 받고서는, 정작 강연장 문은 닫지도 않은 채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강연장 문에서 좀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내 귀에도 크게 들렸으니 다른 사람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신경이 거슬렸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 옆에서 얌전히 교육을 듣고 있던 성질 급하기로 유명한 팀장님은 고개를 홱 돌려 이미 무언의 욕을 날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저건 좀 아닌데'라는 표정으로 뒤를 휙휙 돌아보곤 했다.
나머지 한 분은 내 바로 앞자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분은 교육하는 이틀 내내 교재를 단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수업태도가 좋지 않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수업이 지루하여 눈길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우연이 내 앞에 앉은 그분이 눈에 다시 들어왔는데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교재는 여전히 건들지 않고 있었는데 가만 보니 내가 놓친 부분이 있었다. 그분은 수업태도가 안 좋은 게 아니었다. 어쩌면 강의장 안에 있는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수업태도가 가장 좋을지도 모르는 분이었다.
그분은 교재만 보지 않았을 뿐, 정작 허리를 꼿꼿이 세워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강사님의 강의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그리고 교재는 어차피 볼 필요도 없었다. 스크린에 떠 있는 화면이 교재였고 교재가 곧 스크린 화면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분은 남들 다 자거나 폰 만질 때 1:1 수업이라도 되는 것마냥 이틀 내도록 교육에 임했다. 그분의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진중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분들을 보며 역시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다 있고, 사람을 섣불리 판단해선 좋을 게 없다는 걸 새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이틀 간의 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3명의 강사님을 만났다. 첫 번째 강사님은 푸근한 인상에 발음이 좋았다. 옆에 앉아 있는 우리 팀장님처럼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그런데 뭔가 사람을 졸리게끔 만드는 재주를 겸비하신 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엎드려 자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난 아무리 졸려도 차마 엎드리는 것만큼은 하기 싫었다. 그러면 왠지 공부와 담쌓고 살던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 것 같아서였다. 하여 여느 사람들처럼 결국 스마트폰을 꺼내 들게 되었다. 그렇게 오전을 버텼다.
점심시간이 지난 다음 오후에 만난 강사님은 마르고 예민하게 생긴 분이었다. 오전 강사님에 비해 발음이 많이 좋지 않았다. 우리 팀장님처럼 말도 많이 더듬었다. 말이 약간 빨라서 중간중간 말이 씹히는 빈도수가 많았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그분의 강의는 오던 잠이 달아날 정도로 하시는 말씀들이 귀에 잘 들어왔다. 심지어 수업 내용이 진부하고 스크린을 향한 레이저를 켜는 둥 마는 둥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세 번째 만난 강사님은 전형적인 교수님 이미지였다. 그래서 지루할 줄 알았다. 하지만 수업을 듣고 보니 세 분의 강사님 중 가장 '진짜'라고 생각되는 사람이었다. 강의장에 있는 사람들은 사전에 교재를 1부씩 받았다. 그 교재는 교육자료 PPT 파일의 슬라이드를 한 장 한 장 인쇄해서 제본한 것이었다. 때문에 강의장 스크린에 떠 있는 화면은 모두 교재에 있는 그림과 0.1%도 다르지 않았다. 앞서 교육하신 첫 번째 두 번째 강사님은 그 PPT 슬라이드를 그대로 썼기에 굳이 스크린을 볼 필요 없이 교재만 보면 됐었다.
그런데 세 번째 강사님은 본인이 별도로 준비한 자료가 많았다. 확실히 교재와 같은 그림을 보는 것보다 엉성하긴 해도 강사님만의 생각대로 정리한 자료를 보는 게 훨씬 더 와닿는 게 많았다. 그 강사님을 한 마디로 평하자면 '자기만의 것'이 있었다. 달리 말해 그분은 그분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강의는 두말할 것 없이 다른 분들보다 질이 좋았다. 교육도 교육이지만 중간중간 흘리는 여담이 참 주워들을 만했다. 보면 볼수록 담백한 매력과 남다른 깊이감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그분을 보며 난 생각했다.
글도 저분처럼 써야겠다고.
[저서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