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6. 팀장님이 항상 반복하는 것들
난 살면서 '우유부단'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 단어를 처음 접했던 건 어느 날 새벽에 잠을 깼다가 투니버스라는 만화 채널에서 방영되고 있던 <지구방위가족>이라는 일본 만화에서였다. 그 당시 송출되고 있던 장면은 극 중 주인공의 아빠가 스스로 우유부단하다며 자책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유부단이라는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유독 그 단어는 뇌리에 강하게 박혀서 잊히지가 않았다. 만화 캐릭터의 표정이 울상이어서 좋은 뜻은 아닐 거라고 어렴풋하게나마 예상하긴 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우유부단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 나니까 확실히 좋은 뜻은 아니었다. 고집이 센 건 단점일 수도 있지만 장점일 수도 있다. 마음이 여린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곱씹어볼수록 더 그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물쩡거리는 것에서 과연 일말의 장점을 뽑아낼 수나 있을까. 하필 난 어릴 때부터 주관이 또렷한 사람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만큼 매사 어중간하게 굴기 싫었으며 어중간하게 살기 싫었다. 그래서 더더욱이나 당차고 대찬 사람이 되고 싶었다.
스스로 줏대가 없다고 생각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던 난 운이 좋게도 성인이 되자마자 우연히 책을 접하게 되었다. 독서를 하다 보니 나름 주관이라는 게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다행인 건 그 이후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 더해 글까지 쓰다 보니 그 양상은 갈수록 뚜렷해졌다. 때문에 내 생애 우유부단이라는 단어와는 거의 접점이 없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살면서 겪어본 사람 중 가장 우유부단한 사람을 나의 직속 상사로 맞이하게 될 줄이야. 우리 팀장님은 우유부단의 끝판왕이었다. <지구방위가족>의 주인공 아빠는 쨉(?)도 안 될 정도로.
팀장님은 주변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스킬이 남달랐다. 우선 직장인으로서는 가장 예민할 수밖에 없는 점심시간 때 그 기질이 매우 돋보였다. 팀장님은 현장에 한 번 들어가기만 하면 12시 이전에 나오는 법이 잘 없었다. 매번 정오를 10~20분 정도 넘기고 나서야 점심시간이 지났다는 걸 알아채고 부랴부랴 나오는 게 다반사였다. 한편으론 더 이르지도 더 늦지도 않게 꼭 그즈음에 시계를 확인하는 팀장님이 신기하기도 했다. 설마 일부러 그러는 걸까 싶을 정도로.
뭐 현장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시계나 폰을 볼 여력이 없기도 하고 여러 가지 변수도 있고 해서 시간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긴 하다(내가 알기론 현장에서 발로 뛸수록 점심시간을 더 칼같이 지키지만). 라며 한땐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일할 때도 점심시간을 거스르는 건 매한가지였다. 책상 위에 스마트폰이 버젓이 올라가 있어도, 책상마다 놓인 커다란 2대의 모니터에 보란 듯이 시간이 표시되어 있는데도 팀장님은 점심시간을 지키지 않았다('못 했다'가 어쩌면 더 맞는 표현일 수도 있겠다). 단지 그 뽐새(?)가 현장과 약간 다를 뿐이었다.
"아이쿠 벌써 12시야? 밥 먹으러 가자."
말은 그렇게 하지만 팀장님의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꽂혀 있다.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한동안을 앉아 있다가 꼭 5분에서 10분을 넘기고 나면 사무실을 나서곤 했다.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도 막상 당해보면 정말 환장할 만한 일이다. 팀장님은 거의 매일 그랬다.
가끔 바쁜 일이 끝나고 급할 게 없으면 팀장님은 "오늘은 30분 일찍 밥 먹으러 가자."라는 말과 함께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하지만 막상 11시 30분이 되면 평소와 다름없는 자세를 고수한다. 눈은 모니터에, 엉덩이는 의자에. 그러다 결국엔 일찍 밥 먹으러 가자 해놓고서는 되려 평소보다 더 늦게 사무실을 나선다.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팀장님은 한 번 일에 빠지면 도통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자리에 앉으면 최소 2,3시간은 기본이었다. 점심시간이나 퇴근 시간을 지킬 생각 따위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팀장님과 함께라면 밥 먹으러 가는 길마저도 참 만만치가 않았다. 사무실 근처 식당으로 가는 경로는 총 3가지가 있었다. 편의상 거리가 짧은 순으로 A, B, C로 대체하여 언급하겠다. 내가 그중 가장 선호하는 경로는 단연코 A였다. 왜냐하면 그 길이 가장 짧았으니까. 비록 큰 차이는 없을지언정 분명한 차이는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식당으로 가는 길 A, B, C 중에 당연히 A로 걸어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누구든지 간에.
그런데 팀장님은 누가 봐도 가장 짧은 길을 놔두고 자꾸만 먼 길로 가려고만 했다. 아니, 먼 길로만 가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날은 A로 갔다가 어떤 날은 B로 갔다가 또 어떤 날은 갑자기 C로 갔다가. 그야말로 중구난방이었다. 참으로 이해하긴 힘들었으나 뭐, A로 가든 B로 가든 C로 가든 간에 어쨌든 식당에 가기만 하면 됐기 때문에 그렇게 큰 상관은 없긴 했다. 다만 문제는 매일 가는 그 길에서조차 팀장님은 갈팡질팡한다는 것이었다. 분명 A 쪽으로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향을 틀어 B 쪽으로 갔다가 결국 C로 걸어가는 상황이 팀장님과 밥 먹으러 갈 때면 항상 벌어졌다. 한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으면 짧든 멀든 그냥 그 길로 쭉 가면 그만인데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방향을 수없이 트는 팀장님과는, 정말이지 정신이 너무 사나워져서 따로 걷고 싶었다.
날이면 날마다 그렇게 힘들게 점심을 먹으러 가는 곳은 한식 뷔페집이었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식당 중엔 그나마 그곳이 준수했다. 가까운 대기업 현장에서 일하는 중국인들이 많이 찾는 바람에 좀 시끄러운 것 말고는 나름 괜찮았다. 여하튼 뷔페집에 들어가 커다란 대접에 음식을 받아와 자리에 앉으면 팀장님은 항상 "에잇, 적당히 펐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한다. 근데 그 말을 일주일에 5번 정도 한다. 뷔페집에 갈 때마다 빠짐없이 한다는 말이다. 정말 적당히 펐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인 건지, 팀장님만의 점심식사 루틴인 건지는 알 길이 없다. 설마 내 눈치를 보는 건 아닐 테고(눈치를 볼 만한 일이 전혀 아니지만 왠지 팀장님이라면 그런 걸로도 부하직원 눈치를 볼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았다).
팀장님은 일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매듭이 지어지지 않은 상태로 업무 지시를 내리곤 했다. 팀장님이 업무차 내게 말을 걸면 뭔가가 진행이 돼야 하는데 오히려 올스탑이 되기 일쑤였다. 회사일이 아무리 지루하고 재미없어도 멀쩡하게 일 잘하고 있는데 도중에 멈추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타인에 의해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출 때면, 마치 탄력 받아 등산길 잘 오르고 있는데 느닷없이 누가 내 등을 확 잡아 끄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근데 그런 꺼림칙한 기분을 팀장님이 말을 걸 때마다 느낀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정선임, 이것 좀 바꿔 봐."
"넵. 어떻게요?"
"아~ 그게 있잖아.."
"...?"
"이건 이렇게 바꾸는 게 나을까?"
난 팀장님이 그럴 때마다 말문이 막힌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지?'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온몸에 힘이 빠진다.
"그 최신도면 좀 열어 봐."
팀장님은 뭔가 확인할 정보가 있으면 습관적으로 내게 이런저런 파일을 열어보라며 지시하곤 했다. 본인 컴퓨터에도 같은 파일이 저장되어 있다는 건 아예 망각이라도 한 듯이. 팀장님은 업무 파일에서 토씨 하나라도 수정되면 그 즉시 메일로 공유하라고 하는 편이다. 그렇게 공유받은 파일들은 전혀 활용하질 않는다. 파일 열람을 비롯하여 마우스 클릭 몇 번이면 되는 간단한 인쇄작업도 모두 나에게 지시한다. 다만 팀장님이 그러는 게 일부러 날 골탕 먹이려고 그러거나 직접 하기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부하직원 입장에서 팀장님은 여러 모로 갑갑한 상사인 건 맞지만 남에게 일을 떠넘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성향 자체가 그랬다.
팀장님이 답답하게 일을 시키는 건 어떤 악의를 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까지밖에 생각을 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았다. 근데 어찌 보면 오히려 그게 더 안 좋았다. 그건 곧 팀장님의 한계이며 팀장님과 함께 일하는 동안은 그 한계를 넘지 못하는 수준에서 업무를 봐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세대 차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직급에 '장'을 달고 있는 분들 중 팀장님보다 나이가 많더라도 팀장님만큼이나 컴퓨터 활용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찾아보기 드물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랬다.
이런 날도 있었다.
"그거 다 끝나면 일단 메일은 보내지 마."
"넵."
다음 날 사무실로 출근했더니 책상 위에 A4 용지가 한 장 놓여 있었고 그 위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어제 마무리한 거 메일 송부할 것.'
그걸 보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메일을 보내려고 했었다. 그 사이 팀장님이 옆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더니 메일을 보내고 있는 내 컴퓨터 화면을 보고선 아침부터 속에 천불 나는 말을 했다.
"아, 이거 일단 보내지 마."
어제 퇴근하기 전엔 메일 보내지 말라고 했다가, 오늘 출근하니까 종이에 메일 보내라고 대문짝만 하게 적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는, 그새 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시 메일을 보내지 말라고 하니 사고회로가 정지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말문이 막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팀장님의 결정타가 날아왔다.
"보내야 할까..?"
"..."
팀장님이라는 바람이 나를 한 번 스쳐가면 전투력이 급속도로 떨어져서 잘하고 있던 업무도 하기 싫어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만약 그런 상대가 상급자가 아니라 부하직원이었다면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뭐라 했을 텐데, 업무 효율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게 하필 팀장님이라서 뭔 짓을 해도 일단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게 그저 한스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