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보 Oct 27. 2024

뜻밖의 현금 영수증 이슈

ep 15. 팀장님 우길 걸 우기세요 제발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 입사했을 땐 일거리가 미어터져서 문제였다. 그렇게 꼬박 2년을 시달렸더니 어느새 그 많던 일거리도 대폭 줄어들어 출근해도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든 지경까지 와버렸다. 사무실에서 할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전처럼 누가 쪼는(?) 것도 아니어서 시간적 여유가 많다. 하지만 그런 것치곤 심리적 여유는 생각보다 크게 늘지 않았다. '설마 짤리진 않겠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할 일이 많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 회사 전체가 그런 건 아니었고, 내가 속한 팀만 그랬다.


역시나 대표님은 그런 우리 팀을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느 날 갑자기 처음 보는 일(역량을 벗어난 듯한 일)을 물어와서는 대뜸 할 수 있겠냐는 협박 비스무리한 제안을 해왔다. 우리 팀장님은 나와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웬만하면 일거리 마다하지 않는 팀장님이라도 이번만큼은 딱 잘라 못하겠다며 대표님에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대표님은 확실히 대표님인지 쉽게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보라며 그 일을 시작하기 위해 들어야 하는 교육부터 들으라고 하였다. 팀장님은 교육도 받기 싫어서 한참 후에 교육을 들을 심산이었던 모양인데, 대표님은 그걸 알아챈 건지 손수 교육 사이트를 들어가서 날짜와 장소까지 밥 숟가락 떠먹여 주듯 팀장님에게 알려준 것 같았다(팀장님에게 신청경로를 스크린샷으로 찍어가며 알려준 흔적이 보였다). 운이 좋았는지 주로 서울에서만 열리는 교육일정이 바로 이틀 후에 우리 사무실 근처에서 잡혀 있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회원가입을 하고 교육신청을 했다. 근데 그 과정에서 팀장님에게 부하직원 입장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의 대실망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교육을 들어야 하는 내막을 모르는 상태에서 퇴근한 나는 평소처럼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 7시쯤이었다. 그날 새벽에 유독 잠을 못 잔 아내는 잠시 안방에 들어가 쪽잠을 자며 쉬고 있었기에 난 아이 근처에서 계속 붙어 있어야 했다. 그때 팀장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팀장님은 성격이 워낙 급한 편이어서 '여보세요'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본론부터 들이대고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본인 입장에서 상대방에게 곤란한 화두를 던질 때면 쓸데없는 사족을 붙이며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 팀장님의 전화를 받았더니 말을 더듬거리며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길래, 이번에 또 뭔 소리를 할까 싶으면서 미세한 불안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려했던 것치고 용건은 단순했다. 며칠 뒤에 있을 관리자교육 신청을 하라는 것이었다. 다만 지금 당장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신청을 하면 대표님이 바로 결제하려고 대기 중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곤란했다. 그때 난 아직 목도 제대로 가누질 못하는 아이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방에서 자고 있었고 아이는 눕히면 곧바로 울 것 같았다. 조금 전에 퇴근해서 이제 겨우 숨 좀 돌리느라 쉬러 들어간 아내가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깨는 건 원치 않았다. 그래서 팀장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넸다.


"아, 지금은 좀 그렇고 30분 안에 신청하고 연락드릴게요."


"엄마한테 아이 잠깐 맡기고 하면 안 되나?"


"아…"


팀장님은 당시의 내 상황을 정확히 알 길이 없었으니 자초지종을 설명할 법도 했다. 하지만 난 그냥 그러지 않았다. 설명해 봤자 내 입만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팀장님이 내가 지금 바로 뭘 하기에 곤란한 상황인 것을 알면서도 전화를 끊지 않으려는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았다. 하나는 유선상으로 교육신청 과정을 일일이 안내해 주려는 것이고, 하나는 급하디 급한 본인의 성격을 이기지 못해서였다. 물론 '대표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핑계가 있긴 했지만, 대표님이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내 교육신청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하여 30분에서 1시간 안에만 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때는 이미 해가 지고 난 저녁이어서 7시에 결제하든 8시에 결제하든 다를 게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전화를 끊지 않으려는 팀장님에게 괜한 반항심이 일어났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자꾸 전화로 설명을 한다는 건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짜증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팀장님의 전화를 툭 끊어 버리거나 무조건 안 된다고만은 할 수는 없어서 불안함을 무릅쓰고 아이를 잠깐 매트 위에 내려놓고 노트북 앞에 가 앉았다. 그리고 5분 만에 신청을 완료했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절차를 팀장님은 굳이 전화기를 붙들고 일일이 설명한 게 맞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보다 더한 일을 바로 다음 날 아침 댓바람부터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교육신청 소동(?)이 끝난 다음 날에 사무실에 출근하니 내 얼굴을 보자마자 팀장님은 교육 들어갈 때 챙겨갈 것들부터 준비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에 '대충 메모할 것들 말고 따로 준비할 게 있을까'라는 생각부터 들었지만, 쓸데없이 대응하기 귀찮아서 눈도 마주치지 않고 건성건성 대답했다. 내 옆자리에서 팀장님은 교육신청 현황 사이트로 들어가서 접수증 등을 인쇄하면서 내게도 똑같이 뽑으라고 하였다.


"마이페이지 들어가서 출력하면 돼."


"예."


"지금 당장."


팀장님은 본인이 시킨 일을 눈앞에서 바로 하지 않으면 뭔가 속에서 안 좋은 게 들끓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굴길 좋아해서, 그놈의 '당장'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편이었다.


"아, 예예."


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내 컴퓨터 모니터만 쳐다보면서 교육신청 사이트에 느릿느릿 접속하고 있었다. 그때 팀장님은 재차 지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혼잣말을 계속했다.


"접수증 뽑고, 바코드도 뽑고.."


접수증은 뭐 일반적이었다. 바코드? 뭔진 몰라도 '준비물'에 준할 만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에 들리는 단어가 귀에 날아와 꽂히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현금 영수증도 뽑으면 되고.. 너도 이거 세 개 다 뽑아라잉."


현금 영수증?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내가 아는 그 현금 영수증이 맞는 건지에 대한 궁금증이 삽시간에 차올랐다. 그에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사이트에 로그인하여 내용을 확인해 봤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팀장님이 뽑으라고 했던 현금 영수증은 내가 알고 있던 현금 영수증이 맞았다. 대체 교육 들으러 가는데 현금 영수증을 왜 뽑는 걸까 싶어서 팀장님이 말하는 그 준비물이라는 내역을 잽싸게 조사해 봤다. 준비물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알아보니 필요한 건 신분확인을 위한 바코드뿐이었고, 그마저도 교육 전날 문자로 발송될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로 출력까지 해서 가져가야 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팀장님은 대체 뭘 읽은 것일까.


"팀장님, 제가 보니까 다 안 뽑아도 되는 것들 같아요."


"아, 가져가야 된다고. 빨리 뽑으라고."


팀장님은 이미 접수증과 바코드(고작 스마트폰의 반 만한 크기로 A4용지에 인쇄된) 그리고 문제의 현금 영수증을 이미 다 뽑은 상태였는데, 내게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한 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팀장님은 한 번 머릿속에 인식된 무언가에 균열 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당장의 일처리가 본인이 알고 있는 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패턴을 보이면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듯이.


"여기 보면 적혀 있어요. 바코드만 있으면 된데요. 근데 그 바코드도 출력할 필요 없이 오늘 문자로 보내준다는데요?"


"아, 그거 다 준비해 가야 된다고 쫌! 내가 준비물에 적혀 있는 거 봤다니까. 그냥 뽑으라면 좀 뽑아."


현금 영수증이든 접수증이든 뭐든 간에 1장을 뽑든 100장을 뽑든 어차피 내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었다. 팀장님이 뽑으라면 그냥 뽑으면 될 일이긴 했다. 하지만 난 순순히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이 쉽게 쉽게 넘어갈 수도 있단 걸 알면서도 그랬다. 단순 교육 들으러 가는데 회사 앞으로 처리된 현금 영수증을 뽑아 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멍청하고 바보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상사가 시키는 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듣기만 하는 것도 싫었다. 그건 인간답지 않았으며 나답지 않았다.


그 사이 팀장님은 내게 짜증을 부리면서도 한편으론 본인도 낌새가 이상하다 싶었는지 사이트를 다시 한번 훑어보고 있었다.


"분명히 아까 준비물이라고 봤는데.."


준비물 따위는 없었다. 내 짐작에 팀장님은 교육 신청 내역 하단에 있는 안내사항에 적힌 것들을 모조리 준비물일 거라며 착각한 것 같았다(정확히 접수증, 바코드, 현금 영수증의 순서대로 각각 옆에 '출력'버튼이 크게 놓여 있었다). 속으론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단 반응을 기다렸다. 팀장님의 짜증은 이내 민망함으로 변질된 것 같았다. 굳이 팀장님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미세하게 변한 분위기를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팀장님은 애써 본인의 부끄러움을 감추기라도 하는 듯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아, 그럼 그냥 바코드라도 출력해. 혹시 문자 안 올지도 모르잖아."


팀장님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았으나 여전히 납득하기 힘든 말을 늘어놓으며 고집 꺾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물론 고집을 부린 건 나도 매한가지였다(어찌 보면 작은 반항이기도 했다). 답답했지만 그래도 내가 엄연히 부하직원이니만큼 한 수 접기로 했다. '공공기관에서 돈 받고 하는 교육인데 안내 문자가 안 올리가 있나'라는 생각이 앞섰다만, 더 이상의 대립은 서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결국 난 A4 용지에 스마트폰 반 만한 크기의 바코드가 찍혀 있는 용지를 마지못해 출력했다. 그러고 나서 집어 들지도 않고 퇴근했지만.




사실 이전 회사에서 만났던 상사들이었다면 비슷한 상황에서 난 이미 한소리를 들어도 크게 들었을 것이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상급자가 좀 하라는데도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조목조목 따져들듯 대응하는데 얌전하게 넘어갈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팀장님은 내가 사회생활하며 만나왔던 상사들에 비하면 꽤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엄연한 일터였다. 상사의 인성 여부도 상당히 중요하긴 하나 어쨌거나 일이 우선이었다. 그런 만큼 아무리 상사라 하더라도 납득하기 힘든 업무지시를 내리면 곧이곧대로 따르기는 힘들었다. 아니, 그러긴 싫었다.


이번 현금 영수증 이슈(?)는 남들이 보면 별 거 아닌 사소한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난 심각했었다. 왜냐하면 교육 들으러 가는데 현금 영수증을 뽑으라는 얼토당토 안 한 지시를 내리는 것처럼, 평소 업무 지시를 할 때도 그와 비슷한 경우가 분명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그동안 난 얼마나 해온 건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 과거 야근하며 고생했던 시간들이 아깝고 그때의 내가 안쓰럽게 여겨졌다. 안 그래도 팀장님이 일을 세 번 시키면 그중 한 번은 꼭 하기가 싫긴 했다. 귀찮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딱 봐도 안 해도 되는 일 같은데 노파심에 시키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어서 그랬다. 물론 업무 지식은 감히 팀장님에 비빌 게 못 된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팀장님이 뭔가를 시키면 '이걸 이렇게까지 한다고?', '누가 봐도 중복 아닌가', '내가 이걸 대체 왜 해야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너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애써 모른 체하며 마음을 꾹꾹 눌러 담긴 했는데, 이번 현금 영수증 해프닝을 빌미로 그간 누적된 의구심들이 이때다 싶었는지 한꺼번에 나를 덮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난 누구 밑에서 일할 팔자는 못 되나 보다. 팀장님 밑에서 안 해도 될 일을 하느라 낭비되고 있는 내 청춘을 하루빨리 구조하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