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4.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가 된다 했던가
팀장님이 현장조사를 다니는 곳은 사무실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차로 이동하기엔 가깝고 걸어 다니기엔 약간 멀게 느껴지는 곳. 그곳은 대기업이라 주차공간이 넓고 여유로울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주차하기가 매우 껄끄러웠다. 주차선의 폭도 비좁고 차들이 워낙 많아서 중립기어 이중주차는 기본이자 일상이었다. 그래서 팀장님은 어느새부턴가 현장과 사무실 사이를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난 보통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업무를 보기 때문에 현장 갈 일은 없었다. 다만 가끔 대기업 식당에서 팀장님과 함께 밥 먹을 때면 팀장님을 태우고 내 차를 끌고 갔었다. 그런데 팀장님은 언제부턴가 은근슬쩍 나와 함께 현장을 갈 때면 내 차를 타고 가는 걸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내 차를 끌고 가도 상관없긴 했다. 하지만 팀장님에겐 혼자 잘 타고 다니는 멀쩡한 회사차가 있었다. 원래는 안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사무실 지하 주차장에 회사차를 한 번 주차해 놓으면 도통 시동 걸고 끌고 나올 생각을 않는 것 같았다. 사무실로 걸어가는 길이 1km 남짓이라 걸어가도 생각보다 금방 가긴 했으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그래도 차를 좀 타고 갈 법도 한데, 그런 날에도 묵묵히 걸어 다닐 정도로 팀장님은 회사차를 건들지 않았다.
처음엔 그런 팀장님이 운전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해서 그런 줄 알았다. 가끔 팀장님이 운전하는 회사차의 조수석에 탈 때가 있는데 그럴 때 팀장님이 주차하는 걸 보면 운전경력치고는 주차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한두 번 앞뒤로 왔다 갔다 한 다음 주차를 완료한다고 치면 팀장님은 곱절 이상의 횟수를 주차선 안으로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팀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자세히 알고 나니까 팀장님이 회사차를 끌지 않는 건 좀 다른 이유 때문인 듯했다. 운전이 부담스러워서라기보다는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되도록이면 회사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 것 같았다. '괜히 차를 몰았다가 가벼운 사고라도 나면 어쩌지?' 따위의 생각 때문에 말이다. 팀장님은 평소 여러 방면에서 걱정이 좀 쓸데없이 많은 편이었다.
다만 내 차를 스리슬쩍 타고 다니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진 않았다. 현장에서도 신는 지저분한 신발을 신은 채 차를 타고 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문짝을 쌔게 닫는 게 상당히 거슬리긴 했어도(특히 트렁크문을 닫을 땐 화가 날 정도로 쌔게 닫는다) 그냥 넘어갔다. 빈도 수가 그렇게 많지만은 않았기에.
본사에서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하여 팀장님과 함께 예약한 병원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그날 난 여느 때처럼 아침 9시를 몇 분 남기지 않았을 때 사무실로 출근했다. 팀장님과 함께 차를 타고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팀장님에게 인사말을 건넸다가 돌아오는 대답을 듣고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차 가져왔지?"
"제 차요? 아, 네 차는 타고 왔죠. 근데 차는 왜..?"
"오늘 건강검진받으러 가기로 했잖아."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가 된다'라고 했던가. 평소 내 차를 계속 타기 시작했을 때 진작에 말을 했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을 오다니는 것도 멀쩡한 회사차를 놔두고 내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찝찝했는데 그날 건강검진을 예약한 병원은 사무실에서 10km 떨어진 곳이었다. 기름값을 줄 것도 아니었기에 내 차를 타고 가는 건 당연히 싫었다. 설령 기름값을 준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싶었다.
"왜 회사차 놔두고 제 차를 타세요?"
눈 하나 깜짝 않고 당당하게 말하는 내 모습에 팀장님은 몹시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회사차 타고 갈까?"
"네. 그게 나을 거 같아요."
난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 괜스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드는 게 불편했다. 가뜩이나 팀장님 앞에선 웃음기가 없는 내 표정은 단단한 돌처럼 굳어졌다. 안방에 고이 모셔둔 회사 법인차량 스마트키를 황급히 가지러 들어가는 팀장님의 등에서 '아차'싶은 심정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실은 내가 운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회사차가 있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대뜸 팀장님이 무안함을 무마하기라도 하려는 듯 내게 건넨 말이었다.
"그럼 제가 운전할게요."
"큰 차 운전할 줄 알아?"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믿기 힘들었지만 팀장님은 내가 평소 사무실로 출퇴근할 때 경차를 타고 다녀서 회사차인 소나타를 운전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평소 선입견이 뚜렷한 분인 줄은 알았다만 그런 생각까지 하고 계실 줄은 몰랐다.
"저 집에서는 그랜저 타고 다녀요."
"아.."
드디어 그동안 팀장님이 회사차로 운전할 때 왜 내게 키를 주지 않고 조수석에 얌전히 모시듯 앉혔는지에 대한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한때는 부하직원을 배려하는 보기 드문 상사인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아니었다. 내가 팀장님을 너무 과대평가했었던 것이었다. 어쩐지 지난번에 서울 본사에서 직원 한 분이 내려왔을 땐 고민도 않고 차키를 넘기더라니.
그날 이후 팀장님은 더 이상 내 차를 타고 가잔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직설적인 대답을 듣고서야 상황파악을 하신 것 같았다. 내가 멀쩡한 회사차를 놔두고 굳이 내 차를 끌고 가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 것과 커다란 승용차도 무난하게 운전할 수 있다는 것을.
원래부터 팀장님이 눈치가 없다고 생각하긴 했다만 상상 이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담당하는 카운터를 찾은 다음 난 번호표를 뽑고 대기석에 먼저 앉아 있었다. 뒤이어 번호표를 뽑은 팀장님은 내 옆으로 와 앉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팀장님은 전혀 엉뚱한 곳을 향했다. 그곳은 바로 번호표 바로 옆에 있는 창구였다. 그곳엔 이미 한 사람이 서서 맞은편 직원분과 얘기하는 중이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팀장님은 그 사이를 훌쩍 껴들고서는 다음과 같은 직구를 날렸다.
"저기요! 건강검진받으러 왔는데요."
아, 팀장님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