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3. 마트는 좀 혼자 가시면 안 될까요
팀장님과 함께 구미로 파견 근무를 오던 과장님과 선임님이 퇴사한 후로 팀장님은 사무실 겸 숙소를 혼자 쓰고 있었다. 그래서 밥때가 되면 사무실 근처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던 전과는 달리 혼자 식당 가서 밥 먹는 게 귀찮은지 저녁은 직접 요리를 해서 드시곤 했다. 얼굴에 요리가 없어 보이는 팀장님이 본인 입으로 요리를 잘한다고 했을 땐 의외였는데 알고 보니 군 복무 시절에 취사병이었었다. 덕분에 매주 월요일이면 난 팀장님과 점심을 먹은 후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마트를 간다(가야 한다). 팀장님의 일주일치 식량을 사기 위해.
직장인에겐 귀하디 귀한 점심시간을 팀장님 장 보는 거 따라가느라 소비하는 게 아깝긴 했다. 그럼에도 그냥 군말 없이 따라갔다. 일주일에 딱 한 번 뿐이기도 했고, 팀장님이 은근 측은해서인 것도 있고, 사무실에서 단 둘이서 있는데 괜히 얼굴 붉힐 일 만들어봤자 좋을 것도 없으니까. 다만 웬만하면 본인 장보기 하는데 부하직원을 굳이 데려갈 발상을 떠올리는 것도 쉽진 않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눈(?)을 하고서 매주 월요일마다 "마트 좀 들렀다 갈까"라는 질문인지 부탁인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하는 팀장님이, 한편으론 대단하면서도 눈치가 참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근데 팀장님 따라 마트를 들리는 게 유독 힘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팀장님이 마트에 들어가면 모든 게 정해져 있었다. 동선, 구매 물품, 계산하는 방식 등 모든 게 매번 틀림없이 일정했다. 팀장님이 마트로 진입하여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장바구니를 지나치는(?) 것이다. 팀장님이 항상 마트에서 사는 것들은 양이 그리 많진 않지만 양손을 다 써도 들지 못할 만큼의 가짓수는 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장님은 장바구니의 존재를 망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장바구니는 아예 집어 들지를 않는다.
팀장님이 마트에서 가장 먼저 집는 건 우유다. 팀장님은 현장에서 사무실로 복귀하면 항상 우유를 머그컵에 따라서 전자레인지로 데운다. 그렇게 우유를 전자레인지에 넣어놓고 매번 까먹는 바람에 거의 못 먹긴 하지만서도. 여하튼 마트에 들어가면 곧장 유제품 코너로 돌진한 다음 여러 우유들 중에 값이 가장 싼 두 개 묶음의 우유를 집어든다. 그다음은 바나나다. 팀장님은 하루에 꼭 바나나 한두 개씩을 영양제를 섭취하듯 먹어 치웠다. 마트에서 파는 바나나는 맛도 없다면서 마트를 들렸을 때 바나나를 사지 않은 적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팀장님에게 바나나는 우유와 마찬가지로 '사무실 복귀 루틴'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우유 2개와 바나나 한 팩. 이것만으로도 사실상 양손으로 들 수 있는 건 한계치다. 이때 팀장님은 내 머리로는 상상도 못 할 행동을 취하는데, 그건 바로 우유와 바나나를 마트 입구까지 걸어간 다음 카운터 계산대에 있는 이동식 벨트 위에 뻔뻔하게 올려놓는 것이다. 카운터에 서 있는 직원분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서 말이다. 그러고는 나머지 살 것들을 가지러 쿨하게 그곳을 지나친다. 일종의 '노룩패스(No-Look Pass)'와도 같은 그 장면을 처음 목격했을 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팀장님의 그 행동은 마트 내 다른 손님들과 직원분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요, 무례를 범하는 것이었다. 당장에 계산할 것도 아니면서 계산대 위에 손에 든 것들을 보란 듯이 턱 올려놓고 지나가면 카운터 직원분과 다른 손님들은 어쩌란 걸까. '아직 살 게 몇 개 더 남았는데 손이 모자라니 잠시 올려놓고 금방 다시 오겠다'와 같은 뉘앙스라도 풍긴다면 그나마 나았을까. 아니다. 그랬어도 명백한 민폐였을 것이다. 장바구니는 폼으로 있는 게 아니었다. 여하튼 팀장님은 꼭 마트에 손님이 자기 혼자라도 되는 것마냥 굴었다.
팀장님이 카운터 위에 우유와 바나나를 아무렇지 않게 널브려 놓고서 다음으로 사는 건 찌개용 돼지고기 혹은 백숙용 닭이다(보통은 찌개를 많이 해 드신다). 그리고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 카운터로 가서 아까 전에 올려놓은 것들 옆에 가지런히 놓는다. 그럼 카운터 직원분은 팀장님이 계산을 할 거라고 생각하여 손가락을 슬며시 포스기 모니터로 가져간다. 그러나 팀장님의 턴은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 딱히 살 것도 없으면서 '뭐 다른 거 살 거 없나'라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카운터 주변에 있는 매대를 어슬렁 거린다. 그쯤 되면 카운터 직원분의 표정은 슬슬 일그러진다. 팀장님은 등이 따갑지도 않은지 그러거나 말거나 좀 더 시간을 끈다. 매번 사는 거라곤 우유, 바나나, 찌개용 돼지고기, 가끔 밑반찬 정도로 정해져 있으면서 팀장님은 도통 시원하게 장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똑같은 걸 사면서 항상 뭘 살지에 대한 고민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은근히 장 보는 시간이 짧지가 않았다. 아~ 나의 소중한 점심시간이여.
몇 번 그 꼴을 보고 나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나중에는 내가 장바구니를 들고 팀장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장바구니를 들어도 팀장님의 기이한 쇼핑법(?)은 결코 완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이상해졌다. 처음엔 평소처럼 우유를 집어든다. 그럼 내가 그걸 받아서 장바구니에 넣는다(그때서야 팀장님은 내가 장바구니를 들고 본인 뒤를 따르고 있다는 걸 눈치챈다). 이후엔 바나나를 집어든다. 그 뒤에서 난 당연히 바나나를 달랑 우유 하나 들어 있는 장바구니에 집어넣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며 서 있는다. 그러나 팀장님은 그런 나의 예상을 뒤엎고 카운터로 직행한 다음 한결같이 이동식 벨트 위에 떡하니 바나나를 올려놓는다. 환장할 노릇이다. 그럴 때면 처음서부터 장바구니를 들고 팀장님 뒤를 졸졸 따라간 내가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덩그러니 놓인 바나나를 다시 회수하여 장바구니에 넣는다. 하지만 팀장님은 그 이후에 사는 찌개용 돼지찌개와 나머지들을 또다시 카운터 벨트 위에 올려놓는다. 그런 팀장님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참 힘들지만, 한편으론 설마 내게 미안한 나머지 무게를 가중시키지 않으려고 그러는 걸까 싶은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왠지 내 예상이 맞을 것 같은데도 아닐 거라고 믿고 싶어서 한 번도 그런 질문은 해본 적이 없었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니까.
나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팀장님의 장보기가 끝나고 드디어 물건마다 바코드가 찍히면 종량제 봉투에 내가 직접 팀장님이 산 것들을 다 담는다. 팀장님은 마트 직원들이 쇼핑백에 물건들을 담아주는 게 당연한 서비스라는 이상한 고정관념(특히 본인 같은 단골에게는 더더욱이나)이 있었다. 하여 마트 직원분이 바코드만 찍고 물건을 봉투에 담지 않으면 인상을 찌푸리는 경향이 있다. 내가 손수 봉투에 물건들을 담는 건 그 표정을 보기 싫어서였다. 그렇게 겨우(?) 마트를 빠져나오면 팀장님은 항상 잊지 않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무겁지? 같이 들어~!"
"아, 아니요 괜찮아요. 혼자 들게요."
아무리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어도 우유, 바나나, 손바닥만 한 찌개용 돼지고기 한 팩 정도가 들어 있는 쇼핑백을 남자 둘이서 한쪽씩 나란히 들고 가는 건 그림이 이상할 것 같았다. 팀장님과 같이 들 만큼 무겁지도 않았고 설사 혼자 들기 무겁다고 한들 팀장님과 한쪽씩 나눠서 들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그런 걸로 미안해할 거 같으면 애초에 본인 개인 물품 사는데 왜 굳이 날 끌고 오는지를 묻고 싶었다. 가뜩이나 마트 직원분들은 팀장님과 나의 관계를 상사와 부하직원으로 보기보다는 부자관계로 볼 확률이 더 높았다. 부자지간으로 보기엔 팀장님과 나의 나이는 겨우 20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팀장님은 30살 차이 나는 우리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래서 더욱더 팀장님을 따라 마트에 가는 게 부끄러웠고, 장바구니를 들어주고 종량제 봉투에 계산이 끝난 물건들을 담아 도망치듯 마트를 빠져나갔던 것이다.
누군가 남에게 폐를 끼치는 소식을 어디선가 접하면 본인 일도 아니면서 유독 분노에 쉽게 휩싸이곤 하는 팀장님이었다. 그런 팀장님이 마트에서 벌이는 기이한 행적을 직관하다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난 팀장님의 직속 부하직원치고는 팀장님에게 못하는 말이 별로 없었다. 나중에 해도 될 일 같은데 꼭 지금 해야 되는 거냐고 따져 묻기도 하고, 잘못됐다며 우기는 팀장님에게 팀장님이 일을 잘못 시킨 거라고 나무라기도 한다. 팀장님이 짜증을 부리면 나도 덩달아 인상을 찡그리고, 팀장님이 이상한 말을 하면 가끔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다음의 말은 왜 그렇게 하기가 힘들까.
"팀장님 마트는 좀 혼자 가시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