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1. 시련과도 같은 팀장님과의 협업
야근이 일상일 때는 '야근만 하지 않으면 다 좋은데'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이후 한 번 뒤집어엎은 덕분에(?) 야근은 마법처럼 사라져서 매일 정시에 퇴근해 보니까 확실히 숨통이 트이긴 했다. 기대 이상으로 삶의 질이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인지 새벽 일찍 일어나 글 쓰는 것도 꽤나 수월해졌다. 이전엔 필사적으로 새벽 일찍 일어났다면 이후엔 편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민거리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한 가지가 그 빈자리를 꿰차듯이, 야근이 내어준 빈자리는 고스란히 팀장님이 차지했다. 팀장님은 중의적인 의미에서 '보통'이 아니었다.
나의 주된 업무는 팀장님이 현장에서 조사한 내용을 기반으로 도면을 그리고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업무량이 좀 많긴 했으나 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웬만하면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가끔 스케치 도면에 적힌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앞뒤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부분들이 있을 때만 팀장님에게 질문하면 됐었다. 그런데 팀장님은 '별 것 아닌 일'을 '별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팀장님의 업무방식(정확하게는 인수인계 방식)은 날이 갈수록 나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퇴보하는 듯했다.
팀장님은 사무실로 복귀하면 내 옆에 의자를 바짝 당겨와 앉는다. 그리고 현장에서 조사한 것들을 직접 알려주는데 그게 참 골 때리는(?) 부분이었다. 그건 마치 계산기를 옆에 두고 굳이 암산으로 셈을 하는 것 혹은 내게 읽어야 될 책을 건네주면서 글자 보는 게 어려울 수도 있으니 본인이 대신 읽어주겠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팀장님은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했다. 대부분은 나 혼자서 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판단 하에 방해공작에 가까운 업무지시를 내리곤 했다. 이건 이렇게 해라는 둥, 저건 저렇게 해라는 둥. 그럴 때면 난 꼭 팀장님의 아바타 같았다. 은어와 오타가 뒤섞인 명령어를 입력해 놓고 왜 결괏값이 그 따위냐며 나무라는 조종사를 둔 아바타.
이건 내 추측인데, 팀장님이 내 옆에 바짝 붙어 업무 지시를 내리고 그걸 다 할 때까지 끝까지 지켜보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컴퓨터와 친하지 않아서. 다른 하나는 성격이 급해서.
업무 특성상 컴퓨터로 하는 작업이 많은데 비해 팀장님은 유독 컴퓨터 활용을 잘하지 못했다. 인터넷으로 파일을 다운 받아놓고 매번 어디에 다운로드가 된 건지 몰라 헤매는 걸 보면 말 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대체 그동안 엑셀 작업은 어떻게 한 건지 신기할 정도로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었다.
그런 팀장님은 항상 내게 습관적으로 던지는 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최신 파일 맞아?"라는 의심이 짙게 배인 질문이었다. 업무 중 다루는 파일이 한두 개가 아닐뿐더러 파일 수정이 날마다 이루어지기 때문에 최신 파일이 맞냐는 질문은 꽤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팀장님은 그 말을 너무 남발했다. 각기 다른 파일을 다섯 번 열면 최신 파일이 맞냐며 다섯 번을 물어봤고, 작업 도중 오류가 발견될 때마다 한 번씩 더 되물었다.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다.
하필 내가 출근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이전에 작업했던 파일들을 일별로 갱신하는 것이었다. 가령 10월 14일에 출근하면 그날 열어서 작업한 모든 파일은 10월 14일 날짜로 별도로 저장한다. 내가 한 파일에 덮어서 저장하는 경우는 같은 날 작업한 것 말고는 없다. 날짜가 하루라도 차이 나면 무조건 다른 이름으로 저장한다. 그건 나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대학교 시절 과제하면서 파일을 시원하게(?) 몇 번 날려먹은 후에 다신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겠단 각오로 겨우 들인 버릇이었다. 그런 나여서 그런지 최신 파일이 맞냐며 수없이 따져 물어보는 팀장님의 말은 들을 때마다 신경이 거슬렸다.
물론 최신 파일이 맞는지 아닌지 한 번 더 확인하고 넘어간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나도 사람이기에 아무리 일별로 파일을 관리한다고 해도 분명 실수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팀장님은 내가 최신파일이라 해도 그 말을 당최 믿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팀장님은 컴퓨터에 저장된 기록보다 본인의 기억력에 더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뭐야, 이거 저번에 수정하지 않았어? 이거 최신파일 맞아?"
"네 맞아요."
"전에 수정해 놓고 잘못 덮어쓴 거 아니야?"
"아닙니다. 작년 파일까지 다 열어봐도 수정된 기록은 없어요."
"분명 내 기억엔 수정을 했는데? 파일 헷갈린 거 아니야?"
"최신파일 맞다니까요."
이런 식의 패턴은 오늘날까지도 반복되고 있다. 한편으론 그도 그럴만한 게 팀장님은 기억력이 좋다. 내가 태어나서 본 사람 중 기억력이 가장 좋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현장에서 조사했던 시설이 수백 곳이나 되는데 그 시설들의 구조와 배관 크기 따위를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무작정 10개를 물어보면 8개 이상은 온전히 기억만을 되짚어서 대답하는 분인데 웬만해선 틀리지도 않는다. 그런 팀장님을 보면 종종 소름이 돋기도 한다.
하지만 기억력이 얼마나 좋던지 간에 팀장님도 결국 사람이었다. 사람은 컴퓨터를 이기지 못한다. 기억이 확실하든지 말든지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에 변동사항이 없다면 그건 애초에 작업을 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 컴퓨터가 실수하거나 착각할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팀장님은 본인 기억력이 좋다는 걸 본인도 알아서 그런 건지, 단지 본인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가 싫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도통 컴퓨터를 믿질 않았다. 본인 기억으로는 분명 수정을 했었는데 수정이 되어 있지 않은 걸 목격할 때마다 팀장님은, '사실'을 받아들일 생각은 않고 이전에 조사했던 자료를 뒤져서 증거를 찾느라 시간을 날려먹기 일쑤였다. 역시 뭐든지 지나쳐서 좋을 건 없다던데, 팀장님을 보다 보니 기억력이 너무 좋아도 탈이긴 했다.
내가 태어나서 본 사람 중 가장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팀장님이라면 성격이 가장 급한 사람도 팀장님이었다. 가끔 팀장님은 내게 파일 하나 열어서 뭐 좀 확인해 달라고 하는데 그럴 때면 매번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어제 수정했던 거 100 맞는지 확인 좀 해줄래?"
"넵."
팀장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해당 파일을 열기 위해 마우스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약 3초쯤 뒤.
"100 맞아?"
그에 난 침묵으로 답한다. 이제 막 파일을 열기 시작했기 때문에 대답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100 맞지? 그치?"
아직 파일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찰나의 순간을 참지 못하고 재차 물어본다. 심지어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옆에서 엑셀 파일이 로딩 중이라는 게 보란 듯이 모니터 화면에 떠 있는데 그걸 두 눈으로 보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팀장님은 약간의 과장을 더하면 토씨 하나만 틀려도 즉각 수정하여 즉시 담당자에게 업데이트 파일을 보내라는 지시를 내린다. 만약 체크해야 될 사항이 1에서 100까지가 있는데, 7쯤에서 틀린 부분이 발견됐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93개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런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부득이하게도 우리 팀장님은 그런 분이었다. 덕분에 팀장님이 시켜서 메일을 보내는 나도, 팀장님에 의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비슷한 메일을 받는 상대방도 상당히 피곤해진다.
"또 수정할 부분이 나오지 않을까요?"
라는 말을 마지못해 던지면,
"아, 그럴 리가 없어. 당장 메일 보내."
라는 말이 무심코 돌아온다.
그런 적 치고 수정할 부분이 나오지 않은 적이, 아마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 어느 매체에서 사무실 컴퓨터 바탕화면에 '##_최종', '##_리얼최종', '##_레알찐마지막최종' 뭐 이런 식의 파일들이 즐비한 장면을 봤던 적이 있었다. 그땐 그게 남일이라 생각하고 피식 웃고 말았는데 내가 그런 식의 제목으로 지어진 파일들을 바탕화면에 늘어놓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매번 그렇게 성급히 메일을 보내놓고 뒤늦게 틀린 부분이 또 발견돼서 다시 메일을 송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어찌 그런 확신을 할 수 있는 걸까. 내 머리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서둘러 빨리 보내라며 재촉하는 사람도 없건만 혼자 뭔가에 쫓기듯이.
팀장님은 대체 왜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