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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Oct 27. 2024

팀장님과 과장님의 합작 콩트

ep 12. 사다리 반출 소동


내가 출근해서 사무실에서 도면을 그리거나 문서를 작성하고 있으면 팀장님은 그동안 이과장님과 함께 현장 조사를 다녔다. 팀장님이 하는 조사는 현장 내부 구조와 설치된 시설들을 있는 그대로 조사하는 게 전부여서 장비랄 게 딱히 필요는 없었다. 종이와 잉크가 마르지 않은 펜이면 충분했다. 다만 키가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구조물을 자세히 봐야 하거나 천장 위 덕트룸에 들어갈 때면 A형 사다리를 이용했다. 사다리는 자주 쓰지 않아서 보일러실 같은 곳에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곤 했다.


그런데 한날 현장 내부에 있는 협력업체 물건들을 모두 반출하라는 대기업의 공지가 떨어졌다. 우리가 현장에 놔두고 다니는 건 A형 사다리 하나뿐이었지만 협력업체는 우리뿐만이 아니었고, 우리처럼 장비를 어디 짱박아두는(?) 업체도 우리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기업 측에선 벼르고 벼르다가 현장 곳곳에 숨어있는 잡동사니를 싹 다 내보낼 심산인 모양이었다. 정해진 기한 안에 반출하지 않으면 모조리 폐기처분한다는 내용이 공지사항 한쪽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팀장님은 그 공지를 보더니 골치 아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현장에서 사다리 하나 빼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다리를 사무실까지 싣고 올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팀장님이 사무실과 현장을 오다니며 타고 다니는 회사 법인차량은 DN8 소나타였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도 중형 승용차에 A형 사다리가 실릴지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아마도는 들어가지 않는 쪽으로 생각이 좀 더 기울었다.


그렇다고 돈 10만 원을 주고 용달차를 부르기도 좀 그랬다. 현장에서 사무실까지는 그리 멀지도 않았다. 걷기엔 멀지만 차로 이동하면 노래 두 곡 정도면 도착할 만큼의 거리였다. 그리고 용달비를 지불할 바에야 차라리 현장에 있는 사다리를 버리고 새 사다리를 사는 게 더 나았다. 팀장님은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지 한동안 사다리에 대한 생각은 접은 채로 며칠을 보냈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잘만 흘러가 어느새 공지에 적힌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에 팀장님은 마지못해 일단 회사차라도 타고 가서 과장님과 어떡해서든 사다리를 실어보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왠지 실리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버리고 오기라도 할 것만 같은 인상을 팀장님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무슨 아이디어라도 번뜩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팀장님은 과장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넸다.


"아, 이과장! 이과장 차로 사다리 실으러 갈까?"


"제 차요? 왜요?"


"이과장 차가 좀 더 크잖아."


"제 차가 크긴 뭘 커요."


난 이과장님이 타고 다니는 차가 뭔지 몰랐다. 그리고 듣기로는 이과장님이 타고 다니는 차는 이과장님 차가 아니라 이과장님 아내분의 차였다. 이과장님이 우리 회사에 처음 왔을 때 한동안은 이과장님 아내분이 출근시간에 회사까지 태워주고 퇴근시간에 데리러 오곤 했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이과장님이 출퇴근할 때 혼자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과장님은 차를 사무실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주차했다. 그래서 더더욱이나 이과장님 차를 구경할 일은 없었다. 여하튼 팀장님이 사다리를 싣자고 할 정도면 못해도 최소한 카니발 같은 승합차 이상은 될 거라고 예상했다.


이과장님은 팀장님의 제안이 탐탁지 않는 듯했다. 당연히 현장에서 거칠게 썼던 지저분한 사다리를 차에 싣는다는데 나였어도 싫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과장님도 팀장님 못지않게 우유부단한 분이라 그런지 칼 같이 거절을 못하고 있었다. 얌전히 업무를 보고 있는 내 앞에서 두 분은 마치 콩트라도 찍는 듯 사다리를 누구 차에 실을지의 여부를 놓고 한참 동안이나 왈가왈부했다. 난 어차피 내 소관도 아니어서 힐끔 쳐다보고는 하던 일이나 마저 했다.




점심시간에 팀장님과 과장님 그리고 나까지 세 명은 사무실 근처 식당을 향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결국엔 회사차를 갖고 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점심 먹고 나서 잠시 쉬었다가 오후에 가지러 갈 거라고 팀장님은 내게 말해줬다. 그에 난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아, 네."하고 말았다. '알아서 잘 가져오시겠거니'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 명이서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팀장님과 과장님은 동시에 걸음을 빨리 하더니 한 차 앞에 멈춰 섰다. 그에 난 멀뚱한 표정을 짓고서 걷는 게 세상 귀찮은 것이라도 되는 것마냥 느릿한 걸음으로 뒤따라 갔다. 가서 보니까 이과장님 차가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 들었다. 멀쩡한 내 두 눈을 의심했다. 이과장님 차는 카니발 따위가 아니었다. 이과장님의 차는 바로 소나타였다.


팀장님의 회사차는 'DN8 소나타'

이과장님 차는 'YF 소나타'


대체 뭐가 다른 거지?


설마 같은 소나타를 놓고 사다리를 누구 차에 싣니 마니 실랑이를 벌인 건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정확히 그랬다. 정말 팀장님은 '내 소나타엔 사다리가 실릴 것 같지 않으니 네 소나타에 실어보자'는 제안을 과장님에게 건넨 것이었다(과장님 차가 본인이 타고 다니는 회사 차와 같은 소나타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또 과장님은 그에 질세라 얼토당토 안 한 제안에 고민까지 한 것이고.


팀장님과 과장님은 시늉만 한 게 아니었다. 둘은 진지하게 정통(?) 콩트를 내가 보는 앞에서 찍은 것이었다.


p.s
그날 오후에 사다리는 무사히(?) 사무실에 잘 도착했다. 사다리를 가져올 만한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아 며칠간 끙끙 앓고, 과장님과 니 차 내 차 실랑이를 벌였던 게 허망할 만큼 의외로 사다리는 소나타에 거뜬히 잘 실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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