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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Oct 27. 2024

칼퇴근은 이런 맛이구나

ep 10. 내게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라면


팀장님은 더 이상의 야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지만, 그럼에도 하루나 이틀 혹은 길어도 일주일 정도만 칼퇴근하고 다시 원래대로(?) 야근을 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팀장님이 칼퇴근을 보장한 날로부터 정말로 난 더 이상 야근을 하지 않게 됐다. 야근이라고 해봤자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할까 말까였다. 혹 야근을 하더라도 채 30분을 넘기지 않았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일을 일한다 치면 못해도 7일 이상은 야근했었는데, 마치 야근이 없는 다른 회사로 이직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론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야근까지 해가며 하는 일들이 그럴 필요도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거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야근을 하지 않고 보니까 야근을 하지 않아도 업무엔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야근을 할 때나 하지 않을 때나 업무의 진행속도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야근해서 될 거였으면 진작에 될 일이었고, 야근을 해도 안 될 일 같았으면 야근을 해봤자 별 소용이 없었다.


왠지 팀장님도 야근을 할 때나 하지 않을 때나 딱히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낀 것 같았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일을 못하겠다며 들이받는 바람에 팀장님은 내게 칼퇴근을 약속한 거였지만, 이내 팀장님도 '야근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아서 날 제시간에 퇴근시켜 주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종종 작업하던 업무를 마저 마무리하고 퇴근할 생각에 6시가 넘어서도 계속 일을 하고 있으면, 팀장님이 먼저 '어차피 오늘 전부 못 끝낸다'라는 말을 덧붙이며 집에 빨리 가라고 재촉할 때마다 더욱 그런 것 같았다. 그러니까 팀장님은 야근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잘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 아무렴 어떨까. 중요한 건 더 이상 야근을 하지 않게 됐다는 점이었다. 확실히 야근을 하지 않고 6시에 딱 맞게 퇴근하니까 저녁시간을 안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다른 건 잘 참아도 배고픈 건 잘 참지 못하는 아내는 내가 야근할 때마다 저녁을 혼자 먹었었는데, 야근이 없어지니까 매일 저녁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여유를 가지고 하루의 마감을 할 수 있게 된 만큼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훨씬 수월해졌다. 요컨대 제시간에 퇴근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한층 올라간 것 같았다.




퇴근의 기본값이 '1~2시간 혹은 그 이상의 야근'에서 '칼퇴근'으로 변하니까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그래서 그런지 팀장님한테 대들듯 따져든 게 뒤늦게서야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밥도 굶으면서 6,7시간을 엉덩이 한 번 떼지 않고 밤 10시가 다 되도록 야근했던 그날마저도 조용히 넘어갔다면, 아마 난 지금까지도 야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잘한 일은 아니지만, 나를 위해서라면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상사에게 대들듯 속내를 털어놓은 건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난 평소 감정기복이 거의 없었다.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거나 주먹다짐을 한 적도 만무했다. 상대방에게서 납득하기 힘든 부분을 발견하면 불만을 토로하기보다는 내 생각을 바꾸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친구도 아니고 무려 회사 내 직속 상사에게 하극상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화를 냈던 건, 쓸데없이 낭비되고 있는 황금 같은 젊음의 시간들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야근이 없다 그래놓고 야근하는 것부터가 불만이긴 했지만, 귀하디 귀한 시간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들에 써야 한다는 게 가장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가뜩이나 별다른 재주도 없으면서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월급을 받는 대가로, 내가 허용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 모조리 바쳤다가 시간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은 후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 여파로 인해 한 시간 한 시간이 내겐 정말 소중하게 여겨졌고, 시간을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것만큼 참기 힘든 건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들이붓고 있던 젊음의 시간을 더 늦지 않게 구해낸 건 참 다행이었다. 나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는데 내가 감히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쓰기 말이다.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도 시간이 필요했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해봐야 했다. 그런 걸 보면 좋아하는 일이 있는지의 여부는 인생에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생각 이상으로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난 운이 좋았다. 당장에 퇴사라도 할 것처럼 야근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부하직원을 전후사정을 떠나 탐탁지 않게 여길 법도 한데, 다행히 팀장님은 별다른 제재 없이 칼퇴근을 보장했고 또 그 약속만큼은 지켜줬으니까.


난 그때의 일로 인해 본인에게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작정하고 뒤집어엎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몸소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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