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8. 사람 피 말리는 재주가 탁월한 팀장님
처음엔 야근이라고 해봤자 30분 남짓이었다. 보통은 6시 30분, 늦어도 7시쯤이 되면 팀장님은 그래도 퇴근을 시켜줬다. 물론 그마저도 안 해도 될 일 때문에 야근하는 기분이라 짜증은 났지만 그럼에도 그냥저냥 참을 만은 했다. 하지만 그동안 참아왔던 게 억울할 정도로 어떻게 날이 갈수록 야근시간은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현장조사를 마친 팀장님은 사무실에 5시에서 6시 사이에 도착했다. 도착하면 항상 하는 일들은 정해져 있었다. 우선 가방과 조끼를 벗는다. 그리고 우유를 머그컵에 따라 전자레인지를 돌린 뒤 화장실을 다녀온다. 이후 전자레인지에 데운 새하얀 우유는 새까맣게 까먹고 바로 내 옆에 앉아가지고서는, 현장에서 조사한 것들 중 반영해야 할 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요목조목 구두로 알려준다. 이후 팀장님이 알려준 것들을 빠짐없이 반영 완료하면 그제야 아까 전에 데웠던 우유를 떠올리며 "아, 또 까먹었네. 젠장."이라는 말과 함께(대사도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한다)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여기까지가 팀장님의 사무실 복귀 후의 루틴이다. 팀장님이 의도적으로 정한 루틴은 아닌 것 같은데 매번 그 내용과 순서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작업량이 벅찰 정도로 많을 뿐 어려운 건 거의 없다. 그 말은 즉슨, 팀장님이 바로 내 옆자리에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아 이래저래 설명을 곁들이며 지시하는 것들은 애당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단순히 입력값을 수정하는 엑셀 작업은 말할 것도 없고, 도면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팀장님의 현장 조사표를 바탕으로 도면을 수정하는 거라고 해봤자, 고작 선 몇 개를 추가하거나 지우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수정할 게 아무리 많다 해도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릴 만한 경우는 잘 없었다. 정말 대부분의 작업은 금세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족히 10분이면 끝내고도 남을 간단한 작업도 팀장님만 개입하면 한 시간씩도 걸리곤 했다. 워낙 급한 성격의 소유자라서 그런지 수정되는 것들은 당장에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만 직성이라도 풀리는 사람만 같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를 때가 나은 것 같았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땐, 그저 별생각 없이 팀장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됐었기 때문이다. 수습 기간이 끝날 때쯤 전반적인 업무가 머릿속에 대략적으로나마 그려지는 단계에 진입하면서 해야 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구분할 수 있게 된 탓에 괜히 불만만 많아진 셈이었다. 유명한 격언인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처럼 정말 상황에 따라 모르는 게 약이었다.
야근을 해가며 하는 일들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면(이를테면 마감이 코앞이라던가) 그래도 짜증은 좀 났겠지만, 그나마 일말의 보람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출 기한도 없고 혼자서 못할 일도 아닌, 당장에 하든 말든 아무런 영향도 없는 일을 팀장님 때문에 집에도 가지 못하고 사무실에 남아서 하고 있자니, 속에 천불이 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팀장님은 상대방을 피 말리는 재주가 여럿 있었다. 그중 하나는 퇴근시간에 주로 맛볼(?) 수 있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18시 02분]
"이것만 하고 빨리 퇴근하자."
[18시 35분]
"아, 맞어. 그것도 하긴 해야 돼. 그것까지만 얼른 마무리 짓고 7시에는 집에 가자."
[19시 08분]
"이것도 지금 안 하면 까먹을 것 같은데, 미안한데 이것만 하고 퇴근할래?"
이런 식으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기를 팀장님은 좋아했다. 허구한 날 야근하는 것에 대해 팀장님도 미안해하는 것 같긴 했다. 그래서 '이것만 하고 퇴근하자'따위의 지키지도 못할 말을 남발하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난 쓸데없는 말로 사람 마음을 휘저을 에너지로, 업무 지시를 내리기 전에 먼저 좀 정리부터 하고 나서 할 일들을 알려줬으면 하고 바랐다. 팀장님은 조사를 상당히 꼼꼼하게 하지만 표현력이 엉망이었다. 글씨도 워낙에 악필이고 현장 스케치라고 그린 것들은 남들은 결코 알아볼 수 없게끔 중구난방으로 그렸다. 심지어 본인도 본인 스케치를 한참 들여다보며 해석할 때가 많았다. 그에 들어가는 시간도 만만찮았다. 팀장님이 없으면 내 손은 쉴 새 없이 바삐 움직이는데, 팀장님이 내 옆으로 오기만 하면 내 손은 하염없이 멍을 때리기 일쑤였다.
만약 신체 부위별로 자아가 별도로 있었다면, 아마 내 손은 하루종일 팀장님만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을 것이다.
팀장님은 일들이 점점 서로 맞물리고 꼬여서 바빠지는 거라 했지만, 모든 일을 바쁘게끔 돌아가게 하는 건 팀장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전에 퇴사한 선임님에게 팀장님은 "작품 만들 생각일랑 하지 말고 대강 좀 해야~?"라는 잔소리를 자주 일삼았는데, 내 눈엔 팀장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팀장님은 선임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진 않았다. 선임님은 워낙 소심했던 탓에 상대방의 요구사항을 거절하지 못해서 작품을 만드는 거였다면, 팀장님은 본인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자진해서 작품을 만드는 편이었다. 본인 포함 주변 동료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 이상으로 소모하면서까지.
'혹시 X맨이 아닐까'싶을 정도로 팀장님은 자꾸만 그리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추가시키고, 적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괄호 안에 집어넣으면서까지 적어넣길 좋아했다. 내가 맨 처음 이직하고서 초반에 지시받았던 작업 중 하나는 'OO수조'로 적힌 것들을 모조리 'OO탱크'로 수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수조'라는 단어를 발견하면 싹 다 '탱크'로 바꾸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래서 난 작업 도중 'OO수조'로 적힌 것들이 눈에 들어오면 물어보지도 않고 죄다 'OO탱크'로 바꿨었다. 근데 또 어떤 날에는 반대로 'OO탱크'를 'OO수조'로 바꾸라고도 했고, 심지어는 'OO탱크'나 'OO수조'를 'OO함'으로 수정하란 적도 있었다. 대체 뭐가 맞는 건지 싶었다.
처음엔 명칭을 집착하는 수준으로 수없이 뜯어고치길래 '뭔가 나름의 이유가 있겠거니', '용도가 달라서 그랬겠거니'라며 생각하고 말았다. 근데 그딴 건 없었다. 명칭을 수정하라는 팀장님의 지시는 알고 보니 팀장님의 단순한 변덕에 의한 것이었다. 팀장님은 현장에 라벨이 실제로 그렇게 붙어 있으니 수고스럽더라도 내게 수정작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차후 현장에 드나드는 일이 잦아지면서 보니까, 명칭 수정 관련 작업은 현장 라벨과는 관계없이 본인 주관에 의거한 지시였음을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탱크'인지 '수조'인지 '함'인지를 결정짓는 여부는 그것들의 실제 모양에 의한 게 아니라, 그때그때 달라지는 팀장님의 변덕에 의해 나뉘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나중에는 '수조'나 '탱크'라고 적힌 것들을 '수조(탱크)', '탱크(수조)', '수조(함)' 그리고 '세면대(세척조)'와 같이 수정하라는, 가히 경악스러울 만큼의 업무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사유는 '혹시 남들이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였다. 명칭을 수정하는 건 발가락으로도 할 수 있을 만큼 아무것도 아닌 일이긴 했지만 그건 가짓수가 몇 개 없을 때에 해당하는 얘기였다. 조사하고 관리하는 시설 개수가 수백에서 수천 개가 되다 보니 뭐 한 가지를 고치려면 상당한 노가다(?)를 해야만 했다.
그런 팀장님의 눈부신 활약(?) 덕분에 날이 갈수록 작업 속도는 더뎌지고 작업 난이도는 현저히 올라가는 효과를 맛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장님은 직접 도면을 그리지 않아 잘 와닿지가 않는지 특유의 고집을 철회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