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9. 참다못해 결국 뒤집어엎은 날
야근하는 날이 누적될수록 몸도 피곤했지만 그보단 마음의 피로가 더욱 큰 폭으로 쌓여만 갔다. 정식 퇴근시간은 엄연히 6시였지만 어느덧 7시에 퇴근하는 건 '기본값'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주일에 이틀 이상은 2시간을 내리 야근하고 8시에 퇴근했다. 어느새부턴가 "오늘은 7시쯤 퇴근해 봐."라는 팀장님의 말에는 '요즘 고생하는데 오늘은 일찍 좀 들어가 봐'라는 뉘앙스가 서려 있었다.
근데 야근을 거의 매일 하다시피 하니까 의외의 장점이 하나 있긴 했다. 그건 바로 새벽에 일어나 글 쓰는 시간이 귀해져서 필사적으로 새벽기상과 글쓰기에 임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야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씻기만 해도 밤 9시였다. 새벽 4시 30분에 모닝콜이 맞춰져 있는 내게 밤 9시란 슬슬 하루를 마감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니 새벽에 늦잠이라도 자서 글을 쓰지 못하면 그날의 글쓰기는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여 어떡해서든 새벽에 일어나고자 했고, 대부분은 새벽에 잘 일어났다. 그 덕분에 출근 전 2시간 정도는 매일 책을 읽거나 글을 쓴 다음 출근했다.
뭐, 그것 말고는 야근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야근한다고 해서 누가 칭찬해 주는 것도 아니고, 야근한다고 해서 업무에 유의미한 진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의미 없는 야근의 연속은 그야말로 악순환 그 자체였다. 퇴근시간이 도래해도 어차피 퇴근하지 못할 게 뻔하니 정작 본 업무 시간에는 나태해지기 십상이었다. 팀장님이 사무실로 복귀하면 최소 한두 시간 정도는 시달려야 했다. 때문에 농땡이(?)를 피울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생기면 어떡해서든 그 틈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지 못하면 손해라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굳이 일을 최선을 다해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봤자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내 몸과 마음만 시들어갈 뿐이었다.
돈을 포기하고 시간을 구하기 위해 이직한 직장에서 의미 없는 야근을 하고 있는 현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해도 야근하는 날이 누적되는 만큼이나 팀장님에 대한 분노게이지만 차올랐다. '퇴근도 못하고 이게 뭐 하는 짓일까', '이 간단한 일을 왜 한 시간씩이나 붙잡고 있는 걸까', '야근한다고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왜 꼭 지금 당장 해야만 한다는 걸까'와 같은 생각들이 야근하는 내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당시엔 한참 살을 빼고 있을 때라 저녁은 원래 먹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야근하는 날이 지속되다 보니 괜히 밥도 못 먹고 일하는 게 슬슬 짜증이 났다. 밤 8시에 퇴근한다는 건 곧 점심을 먹고 난 후 8시간이 지나야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걸 뜻했다. 다이어트를 위해 저녁을 자의적으로 안 먹는 것과, 야근 때문에 저녁을 타의적으로 못 먹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안 그래도 인내심에 한계가 오고 있던 즈음에 팀장님은 아슬아슬하게 즈려밟고 있던 선을 드디어 짓누르고야 말았던 날이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난 야근할 생각에 암담한 기분으로 출근했다. 근데 팀장님이 현장엘 가 있지 않고 문서 작업할 게 있다며 사무실에 있었다. 그래서 그날은 아침부터 팀장님 바로 옆에서 일했다. 그나마 팀장님이 오기 전 혼자 일하는 시간이 나름의 '충전타임'이었는데, 그날은 온종일 시달려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아침부터 축 쳐졌다.
오전은 어영부영 무난하게 잘 넘어갔다. 팀장님이 내게 말만 걸지 않으면 사무실에서 일하는 건 상당히 괜찮았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끝난 뒤 오후부터는 팀장님은 내 옆으로 의자를 바짝 붙여 앉아서 현장조사한 것들 반영 좀 하자며 바삐 움직이던 내 손에 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팀장님이 개입하면 오히려 일이 꼬이기 일쑤였지만, 어차피 해야 될 일이기도 하고 그땐 또 본 업무 시간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잘 추슬러보자며 속으로 되뇌었다. 팀장님이 하라는 대로 차분하게만 하면, 어쩌면 오늘은 좀 더 일찍 퇴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희망도 가지면서.
그러나 이변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날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팀장님은 현장에서도 그리 쉬지도 않고 일하더니 사무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팀장님이 내 옆에 앉은 시간은 정확히 오후 3시였다. 그때부터 팀장님과 난 해가 지고 늦은 밤 퇴근할 때까지 엉덩이를 한 번도 떼지 않고 일을 했다. 당연하게도 내 뜻은 아니었다. 한 번 일에 빠지면 도통 다른 건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는 팀장님 특유의 집중력에 의한 것이었다. 가뜩이나 종일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서 열이 받치는데 팀장님은 또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사람 속을 까뒤집었다.
"이것만 마무리하고 끝내자."
라고 했다가,
"찝찝한데 저것도 다 해버릴까?"
라고 했다가,
"흠, 이건 지금 하지 않으면 까먹을 거 같은데 잠깐만 다시 열어볼래?"
라며 말하는 식으로 말이다.
'제발 그냥 해야 될 게 있으면 쓸데없이 사람 마음 들었다 놨다 하는 소리 하지 말고 좀 한 번에 가면 안 될까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겨우 참느라고 애를 먹는 동안 시간은 어느덧 밤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아내는 팀장님한테 붙잡혀 있는 날 구조(?)하고자 일부러 전화도 계속 걸고, 언제 오냐고 다그치는 카톡도(오른쪽 듀얼모니터에 카톡 화면을 크게 띄워놨었다) 계속 보내줬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팀장님의 머릿속엔 끝내고자 하는 일을 끝낼 생각밖에 없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결국 난 터지고 말았다.
"팀장님. 저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일 못하겠습니다. 맨날 이런 식으로 늦게까지 일하면 대체 퇴근시간은 왜 있는 겁니까?"
팀장님은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충격적인 장면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 미안, 오늘까지 꼭 해야만 되는 것들이라.."
처음에 아무것도 모를 땐 팀장님의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었다. 하지만 팀장님이 그렇게 얘기한 것들치고 실제로 급한 것들은 별로 없었다. 거래처 담당자에게 밤늦게 메일을 보내도 며칠 동안 읽지 않은 적이 태반이었다. 보낸 메일을 아예 읽지도 않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자료를 요청한 적도 많았다. 정말 밤 10시가 다 되도록 끝내야만 하는 일이었다면 마감날짜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그저 팀장님이 미리 안 해 놓으면 불안하니까 밤늦게까지 작업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하며 어렵사리 뱉은 팀장님의 답변은 내겐 그저 핑계이자 거짓말에 불과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동안 묵혀왔던 말들을 다 쏟아내려 했지만,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바람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래서 그냥 팀장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사무실 밖을 나서는데 등 뒤로 팀장님의 말이 들려왔다.
"정선임 미안해. 오늘까지만 이렇게 하고 내일부턴 정시에 퇴근하자."
그 말에 난 신발을 고쳐 신으면서 팀장님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분노가 서린 눈빛으로 다음의 말을 내뱉고는 사무실 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계속 이렇게 일한다면 제가 이직한 이유가 없습니다."
문이 닫히는 틈새로 당황스러움으로 가득 찬 팀장님의 표정이 보였다.
집에 가서 분을 삭이고 있는데 팀장님에게서 장문의 문자가 도착했다.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이랬다.
1. 늦게까지 일 시켜서 미안하다.
2. 내일부턴 무조건 6시에 칼퇴근을 보장하겠다.
3. 혹시라도 야근할 일이 생기면 사전에 미리 알려주겠다.
상당히 괜찮은 제안이었다. 팀장님이 보낸 문자대로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회사에 대한 내 유일한 불만은 오직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야근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딱히 크게 동요하진 않았다. 팀장님의 신뢰도는 진즉에 바닥으로 추락한 지 오래라, 팀장님이 하는 말은 대부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단지 이전에 그만둔 과장님과 선임님처럼 나까지 그만둘까 봐, 급한 불 끈답시고 뒷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일 거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냥 답장도 하지 않고 부정적인 기운으로 들끓는 마음의 여운을 가라앉히고자 잠이나 자버렸다.
다음 날, 살짝 민망한 마음을 끌어안고 겨우 출근을 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과장님이 일찍이 와 있었다. 날 보며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 걸 보니 팀장님에게 대충 자초지종을 들은 듯했다(이과장님은 현장 지원하러 오신 분이라 평소에는 사무실에 잘 안 계신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팀장님이 나왔고 어색한 미소로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왔어~? 어제 내 문자 봤지? 오늘부터 6시 되면 바로 퇴근해."
바라고 바라던 바였지만 그렇게 막 와닿지가 않아서 덤덤했다. 한편으로는 참으로 당연한 소리를 그렇게 숱한 절차(?)를 거친 후에야 듣는 게 허탈하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전이 지나고 황금빛 노을빛이 세상을 비출 무렵인 6시가 되자마자 난 바로 퇴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