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보 Oct 27. 2024

다 퇴사하고 나홀로 사무실

ep 6. 난 과연 팀장님을 버틸 수 있을까


팀장님과 과장님 그리고 선임님은 우리 회사에 오기 이전부터 세 명이서 이미 한 팀이었다고 했다. 전 회사에서 일하면서 주말도 내리 출근하는 등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팀장님을 필두로 하여 세 명이 함께 지금의 회사로 이직한 거라고 했다. 그러니 세 명의 관계는 꽤 돈독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직하고 나서 좀 지켜보니까 세 명은 서로 그다지 친하지 않은 것 같았다. 사이가 저럴진대 과장님과 선임님이 어떻게 팀장님을 따라 지금의 회사로 오게 됐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리고 과장님과 선임님은 팀장님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세분들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현장조사를 마친 후 사무실에 복귀하고 나서 30분에서 2시간 남짓한 정도였는데, 지켜보니까 그랬다.


일단 과장님은 팀장님과 딱히 대화를 하지 않았다. 처음엔 본인 할 일 하느라 바쁜 나머지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과장님은 팀장님과 아예 말을 섞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가끔 두 분이 대화할 때가 있는데 그건 바로 팀장님이 과장님에게 잔소리를 할 때였다. 팀장님의 주장에 따르면 과장님은 '재빠르기만 한 오류투성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현장조사 내역에 오류가 발견되면 선임님도 아니고 본인도 아니고 가장 먼저 과장님부터 의심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과장님은 내공이 꽤나 쌓였는지 전혀 대미지를 입지 않는 것 같았다. 팀장님이 머라고 하든 간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훤히 보였다.


과장님은 항상 퇴근하고 나면 루틴이 일정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화장실 한 번 갔다가 나와 반대편에 있는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자마자 즉시 업무를 보는 것이었다. 하루종일 현장에서 고되게 조사작업을 한 사람치곤 컴퓨터 책상에 앉는 동작이 재빨라서 '일을 좋아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알고 보니 현장 조사를 마친 후에 하는 일이 바로 과장님에게 부여된 본 업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과장님이 진짜 해야 할 일은 항상 퇴근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책상에 앉아 부랴부랴 작업하는 바로 그 일이었다.


선임님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임님도 퇴근하면 가방만 내려놓고 조끼는 그대로 입고서 내 옆에 앉아 남은 업무를 처리하곤 했다. 선임님은 처리하는 일이 주로 현장과 관련된 일이어서 팀장님과 대화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선임님은 팀장님이 5번을 말하면 2번 정도는 무응답으로 대응했다. 난 처음에 반항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는데 팀장님도 아무 반응이 없는 걸로 봐서는 그게 일상인 듯했다. 그래도 그렇지 상사가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아무 대답도 않고 있으니 옆에 있는 나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했다. 하지만 선임님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차차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나중에 다시 쓸 일이 있을 테니 여기선 나도 선임님처럼 팀장님이 말하면 대답을 잘하지 않게 됐다는 것까지만 드러내고 넘어가겠다.


팀장님이 선임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작품 좀 만들지 말자."였다. 예컨대 현장에서 1 정도만 조사하면 되는 것을 선임님은 1.8까지 부풀려 조사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1을 초과한 0.8에 의해 정작 중요한 1이 흐려진다는 점이었다. 도면을 그리는 입장에서는 악필 중에 악필인 팀장님의 스케치보다 선임님의 스케치가 더 알아보기가 까다로웠다. 선임님은 내가 봐도 확실히 쓸데없는 디테일에 집착하긴 했다. 좋게 보면 꼼꼼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정도가 좀 지나쳤다. 또한 갑 업체에서 3을 요구하면 자체적으로 3.7을 내주려는 경향도 있었다. 팀장님은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하고 있는 선임님을 보며 답답한 티를 많이 냈었다.




과장님과 선임님은 나보다 일찍 퇴근한 걸 본 적이 없었다. 아마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평균적으로 퇴근하는 게 한 시간 정도 야근하고 난 후인 오후 7시쯤이었는데, 두 분은 거의 8,9시까진 매일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퇴근하는 모양이었다. 아침 8시가 되기 전에 사무실을 나서고 해가 질 때까지 현장조사를 한 다음, 사무실에서 밤 9시가 다 될 때쯤에야 겨우 퇴근하는 그런 패턴을 매일 반복하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주변에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그건 버티기가 힘들었을 텐데, 팀장님과 함께 그렇게 밤늦게까지 한 공간에서 생각하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러웠다.


우리 팀이 맡은 프로젝트는 한두 달 만에 끝날 게 아니었다. 어림 잡아도 최소 2년 이상은 걸려야 겨우 끝낼까 말까 한 일이었다. 근데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일한다면 누구든지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뻔해 보였다. 막말로 군대가 차라리 낫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최소한 군대는 정해진 쉬는 시간이 있고, 저녁에 개인 정비시간이 있고, 정해진 전역날짜라도 있는데, 팀장님을 따르는 직원들에겐 쉬는 시간도, 오늘 하루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도, 지금 하는 일들이 당최 언제 끝날지도 모른 채 온종일 일밖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누구 한 사람이 언제든지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는 그림이었고, 팀 자체가 하루아침에 분산돼도 할 말이 없는 업무강도였다. 그 정도면 현장 조사하는 시간을 조정할 법도 한데, 팀원들을 이끄는 팀장님은 시간 조정은커녕 오히려 날이 갈수록 현장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욱 길어지기만 했다.


팀장님은 아무리 봐도 전형적인 '한 그루 나무에 홀려 숲을 보지 못하는 사람' 혹은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주변 상황에 맞게끔 일을 조정하는 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들을 일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유형이었다. 아무리 직장인이 생계유지를 위해 자진하여 회사를 다니는 건 맞다지만 그렇다고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온종일 팀장님과 함께 현장에서 바삐 걸어 다니고 기어 다니는 것도 모자라, 퇴근시간이 지난 후에도 사무실에서 밤늦게까지 팀장님에게 잔소리를 들어가며 야근하는 일상을 감내하는 과장님과 선임님은 상당히 지쳐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그런 상황에서 지치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이다). 겉모습만으로도 그런 낌새가 느껴졌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부터 과장님이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기 시작했다.




팀장님과 과장님 그리고 선임님은 셋 다 광주 사람이었고 우리 회사를 오기 전부터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팀장님을 필두로 세 명이 한꺼번에 우리 회사로 넘어오면서 광주팀이 꾸려진 것이었다. 근데 일거리가 광주에는 없고 구미에 있었던 관계로 부득이하게도 세 명이 평일마다 함께 회사차를 타고 구미까지 파견근무를 오는 것이었다.


처음 과장님이 출근하지 않았을 땐 광주에 일거리가 생겨서 그런 거겠지 싶었다. 알고 보니 과장님은 정말 광주에 일이 잡히는 바람에 광주 사무실에서 일하느라 안 오는 게 맞긴 했다. 하지만 과장님 혼자 광주에 남게 된 진짜 이유는 팀장님과 함께 일하는 게 버거워서 그런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도 처음엔 한동안만 그러다 말겠지 싶었다. 광주에 계속 일거리가 있을 만한 분위기는 아니어서 하던 것들마저 끝내면 다시 전처럼 내가 있는 사무실로 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 후로는 과장님을 더 이상 보지 못했다. 광주에 일거리가 다 떨어질 때쯤 이미 과장님은 이직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나랑 동갑내기 선임님은 과장님이 오지 않으면서부터는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선임님이 약소하게나마 의지할 대상이 과장님인 것 같았는데 그런 과장님이 없으니 선임님은 온전히 팀장님과 둘이서 모든 것을 해야 했다. 해가 떠 있을 땐 팀장님과 둘이 현장에서, 해가 졌을 땐 팀장님과 둘이 사무실에서, 주말의 시작과 끝은 팀장님과 둘이 광주와 구미를 잇는 고속도로 위를 3시간 30분 동안 달리는 그런.




한 번은 현장 지원을 나갔다가 사람이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구석에서 선임님과 둘이 농땡이(?)를 치며 담소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어쩌면 너무 자연스럽게도) 팀장님 얘기를 참 많이 했는데 대충 들어보니 선임님은 딱 예상대로의 불만을 팀장님에게 지니고 있었다. 쉬지 않고 일하는 점, 기준도 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팀장님의 업무 방식, 야근, 그리고 좀처럼 메워지기 힘든 세대 간의 소통 문제 등. 듣자 하니 팀장님은 광주팀을 구미로 이끌고 올 때 꽤나 달콤한(?) 업무 환경을 약속한 모양이었다. 쉬엄쉬엄하고 금요일엔 재량껏 일찍 마치자는 뭐 그런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 그러니까 내게 야근이 없다 해놓고 야근을 시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의 사기를 과장님과 선임님도 팀장님에게 당한 듯했다. 


그렇게 오전부터 점심시간까지 한참을 팀장님에 대한 얘기를 하더니,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마는 듯이 "저 겨울까지만 하고 그만둘지도 몰라요."라며 내게 고백하듯이 말했다. 뭐, 애당초 말도 안 되는 업무강도를 견디고 있었기에 언제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법한 말이긴 했다. 그럼에도 내심 많이 아쉬웠다. 선임님이 과장님을 의지했듯 나도 그나마 선임님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엔 동갑이란 것도 한몫했지만 그간 정이 들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그 후 선임님은 내게 퇴사할 수도 있다고 말했던 시점에 정말 퇴사를 했다. 한 달만 더 있으면 퇴직금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그걸 마다하면서까지 속히 퇴사 절차를 밟아나갔다. 참 어지간히도 팀장님과 함께 하는 게 싫은 것 같았다.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한편으론 겉으로 아무 내색도 않던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었는지가 와닿는 것 같아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나저나 일복 하난 타고난 나였기에 사회생활하면서 웬만한 사람들보단 참 고생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 나였는데, 과장님이나 선임님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세상엔 참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하지만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나의 방패막이기도 했던 과장님과 선임님이 모두 떠나갔으니 팀장님의 모든 영향은 온전히 내게로 쏠릴 터였다.


난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팀장님과의 대립을 대비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