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보 Oct 27. 2024

직원들이 왜 똥 씹은 표정인지 알겠다

ep 5. 팀장님과의 현장 견학


팀장님이 퇴근만 하면 내 옆에 와서 괴롭히는(?) 날들이 누적되면서, 옆에 있는 과장님과 선임님은 거의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게 됐다. 그때부터 회사생활은 온전히 팀장님과의 줄다리기라고 할 수 있었다. 과장님과 선임님은 엄연히 회사 내에선 나의 직속 상사였으나 그런 것치고는 거의 남남 같았다. 마치 내가 외부에서 섭외한 프리랜서라도 되는 것처럼 대했다. 좋게 보면 서로 존중하고 매너를 지키는 것이었고, 나쁘게 보면 친해질 기미라곤 1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았다. 만약 그들마저 나를 작정하고 괴롭히려 들었으면 아마 난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팀장님의 아날로그적인 업무방식은 가면 갈수록 내 스타일과 맞지 않은 게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속도와 퀄리티를 다 챙겨주길 원했지만, 아직 업무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그때의 난 속도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더군다나 과장님이나 선임님에게 물어보는 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과장님은 뭘 물어보면 대답은 친절하게 해 줬지만 "앞사람이 해놓은 거 보고 따라 하시면 돼요."라는 말과 너털웃음이 돌아올 뿐이었다. 선임님은 과장님보단 일을 잘 알려줘서 그나마 일말이라도 의지는 됐었다. 하지만 뭔가에 시달리고 있는지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아서 말 한마디 걸기가 힘들었다. 가뜩이나 초반엔 성격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았어서 워낙 말수가 없는 게, 기분이 나빠서 그런 건지 원래부터가 말이 없는 건지를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업무파악이 조금씩은 되어 갔다. 팀장님의 날림체(?)를 점점 알아보기 시작했고, 선임님이 크로키하듯 휘갈겨 놓은 선들이 직선인지 곡선인지를 구분하기 시작했고, 과장님에겐 아예 질문하지 않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업무파악이 될수록 마음이 편해지는 면도 있었지만 오히려 안 좋은 점도 있었다. 매일 같이 야근 업무 중에 하는 작업들이 점점 무의미하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퇴근 후에 하는 일들은 '그때 하지 않아도 될 일'만 같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일해야 하나 싶은 마음에 점점 답답해졌다.




한 번은 도면을 그리는 설계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니 현장도 한 번 가봐야 한다면서 견학 삼아 따라간 적이 있었다. 팀장님 과장님 선임님 세 명이 커다란 가방을 하나씩 짊어지고 오다니던 그 현장이었다. 조사하는 곳은 한 대기업 회사였는데 나름 대기업이라 그런지 한 번 들어가는데 잡다한 절차가 많았다. 겉으론 그럴싸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하등 쓸데없는 것들. 여하튼 소소한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현장은 대기업답게 깔끔했다. 먼지만 날려도 제품불량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방진복을 입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안 그래도 방진복 입고 일하는 곳은 어떤 곳인지 궁금했었다. 예전에 구인구직 사이트에서 공장일을 알아볼 때 방진복을 입고 일하는 곳을 일부러 찾아보기도 했었는데, 이유는 그만큼 적당한 온도와 깔끔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방진복을 입고 현장 내부를 돌아다녀보니 상당히 불편했다. 환복기준이 까다로워서 현장을 드나드는 것 자체가 귀찮고 번거로웠다. 평발이라 그런지 쿠션감이 없는 방진화를 신고 조금만 걸어 다녀도 발바닥이 아팠다. 차라리 땀 흘리며 좀 더 자유로이 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 팀은 안전모, 방진복, 방진화, 제전장갑까지 낀 채로 조사를 했다. 안 그래도 조사를 어떻게 할지 내심 궁금하긴 했는데 현장 내부 구조가 상상 이상으로 복잡했다. 조사해야 하는 시설의 개수가 상당했던 만큼 그에 딸린 배관들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과연 나라면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한 팀장님과 과장님 그리고 선임님이 왜 그런 식으로 대충 휘갈기듯 스케치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기도 했다.


우린 2인 1조로 찢어졌다. 과장님은 선임님과 함께 움직였고 난 팀장님을 따라갔다. 팀장님이 이것저것 설명해 주시는데 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치곤 현장구조를 훤히 다 아는 사람만 같았다. 다만 현장의 풍경을 눈으로 담는 게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았다. 팀장님의 설명이 잘 와닿지가 않았을뿐더러, 현장의 실제 모습과 팀원들이 그려오는 스케치 그리고 내가 그리는 도면은 각개전투를 하는 것마냥 매칭이 쉽게 되지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현장에서 조사하는 사람들이 직접 도면을 그리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은 했다. '내가 알아서 잘 걸러야겠구나', '정신 차리고 일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어느 정도 설명을 곁들이던 팀장님도 한참 일할 때는 조사에 집중하느라 난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난 팀장님 옆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나중에 도면 그릴 때를 대비하여 현장을 눈여겨보려고 했으나 희한하게 졸음이 자꾸만 몰려와서 잠 깨우는 데만 온 힘을 다 썼다. 팀장님이 어떤 식으로 그리는지 곁눈질도 했는데 그것도 이내 몇 번 하다가 말았다.




그런데 팀장님을 계속 따라다니다 보니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팀장님은 도통 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침 휴대폰을 들고 들어가지 않았던 관계로 정확한 시간은 몰랐지만 느낌상 족히 11시는 넘은 것 같았다. 슬슬 기분이 처지기 시작했다. '설마 점심시간 전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조사할 작정인가'하는 의구심은 거의 확신에 가까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팀장님은 여기저기 조사한다고 몰입하느라 시간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내가 하는 거라곤 옆에 가만히 서서 팀장님 조사하는 걸 지켜보고 현장을 훑어보며 눈에 익히는 게 다였다. 하지만 사람이 뭔가 할 게 없으면 없던 졸음도 한꺼번에 밀려오는 건지 눈이 스르르 감길 정도로 졸려서 혼났다.


잠시 후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중에 현장 내부 직원들이 사용하는 업무용 모니터에 찍힌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 전부터 처지고 있던 기분을 누가 확 끌어내리기라 한 듯이 몸이 화끈거렸다. 예상대로 11시가 넘어간 건 맞는데 예상외로 이미 12시도 훌쩍 지나 있었던 것이다. '점심시간 지났다고 말을 해야 하나'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지 궁금해져서 가만히 지켜봤다. 팀장님은 완전히 일에 빠져 있었다. 좋게 보면 집중력이 좋아 보였고 나쁘게 보면 전형적인 눈앞에 나무 한 그루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만 같았다.


12시 20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잉? 뭐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나가자, 나가자. 밥 먹자고 하는 일인데 밥은 먹고 해야지."


'장난치나..'


화들짝 놀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하는 팀장님을 보면서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최소한 꾸밈은 없는 분이어서 점심시간이 지난 걸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하는 그런 건 아닐 거라 여기면서도, '일부러 저러는 건가'싶은 심술궂은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그에 진이 빠진 나머지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대꾸할 힘도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팀장님의 뒤를 따랐다. 한껏 차오른 분을 삭이며.


출구 쪽에 나가보니 과장님과 선임님이 있었다. 12시가 되기 전부터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당연하게도 표정은 좋지 않았다. 방진복과 안전모 그리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보이는 건 눈밖에 없었는데, 그들의 눈빛만으로도 대강 '저들도 나만큼이나 열이 받쳤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과장님과 선임님의 분노에는 '익숙함'이 서려 있다는 게 나와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었다. 네 명 중 배고프다며 호들갑 떠는 건 팀장님밖에 없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일부러 눈치가 없는 척을 하는 건지는 당최 모를 일이었다. 둘 중 뭐가 됐든 최악일 테지만.


아침 8시 30분부터 현장에 들어와 이곳저곳을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쉼 없이 걸어 다니다가, 점심식사 시간을 한참 넘기고 나서야 먹는 밥은 지지리도 맛이 없었다. 뻔히 현장 내부에 구내식당이 있는데도 저 멀리 있는 한식 뷔페집(거의 함바집이나 다름이 없는)까지 굳이 걸어가서 먹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또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대기업 현장이라 워낙 넓은 나머지 탈의실로 가서 옷 갈아입고 출입문 바깥으로 완전히 빠져나가는 데만 최소 20분은 넘게 걸렸다. 그런데 한식 뷔페집까지 뜨거운 볕 아래 걸어갔다 오는 것도 왕복 15분 정도였으니, 점심시간에는 정말 점심만 먹고 쉴 새도 없이 바로 현장에 들어와야만 했다. 물론 12시를 초과해서 나오면 초과한 시간만큼이나 쉬었다 들어가자며 팀장님은 나름의 호의(?)를 베풀지만(그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않지만), 제시간에 쉬는 것과 이미 시간을 초과해서 좀 더 쉬는 것에는 현저한 심적 차이가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내가 온 첫날에 팀장님이 안 그러다가 그러셨던 거겠지 싶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오후에는 오전과 달리 그래도 좀 쉬어가면서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역시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오후에도 쉴 새 없이 걸어 다니고 수없이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가끔은 거의 포복자세로 기기도 하면서 조사를 하는 동안 쉬는 시간 따윈 없었다. 예전에 소위 노가다(?) 현장에서 목수일을 할 때도 오전 오후 한 타임씩은 쉬면서 일을 했건만. 팀장님에게선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엔 오직 '일'밖에 없었다. 한편으론 발로 그렇게 뛰어다니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는 그 저력이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난 그렇게 한 가지에 집중을 오래도록 하는 걸 잘하지 못하니까.




원래 같으면 내가 현장 내외부 구조를 그리는 도면 담당자였던만큼 현장의 실제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자 애를 쓰는 게 마땅했으나, 그 당시 내 안중에는 온통 팀장님이 퇴근시간을 지키는지 마는지의 여부밖에 없었다. 현장에서의 쉬는 시간은 이미 물 건너간 거 같으니 팀장님의 '퇴근시간 엄수'만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퇴근 시간을 그리 신경 썼던 이유는 오늘은 견학 삼아 한 번 따라온 셈이지만, 언제 다시 팀장님을 따라 현장에 오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팀장님이 내게 말하기로는 "가끔 일이 있을 때만 현장 지원을 해주면 된다."라곤 했어도, 분위기로 보아하니 급변하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나도 과장님이나 선임님처럼 현장에 지속적으로 나가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야근이 없다고 해놓고 야근을 시키는 것에서 이미 팀장님의 신뢰도는 추락한 지 오래였다. 그것만 보더라도 팀장님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는 게 바보였다.


애석하게도 나의 마지막 희망은 보기 좋게 으스러졌다. 팀장님은 오후 5시를 꽉꽉 채우는 것도 모자라 5분 정도를 넘겨서 밖으로 나가자는 말을 꺼냈다. 현장과 사무실과의 거리는 차로 이동하여 20분 거리였다. 여하튼 현장을 따라간 첫날은 왜 그동안 팀장님, 과장님, 선임님이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야 사무실에 도착하는지 너무도 잘 알게 되었던 알찬(?) 하루였다. 그리고 과장님과 선임님의 표정이 왜 항상 똥 씹은 표정이었었는지까지도.

이전 05화 하필 나와 상극인 직속상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