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4. 보면 볼수록 나와 상극인 우리 팀장님
우리 회사도 여느 회사들처럼 수습기간이 3개월이었다. 야근이 없다고 해놓고 출근 첫날부터 스리슬쩍 야근을 시켰던 팀장님의 만행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난, 수습기간이 끝날 때까지도 야근지옥이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미련 없이 퇴사하겠다며 단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연봉이 반토막 나는 걸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이직을 감행했던 건 '9 to 6'의 업무시간', '주 5일제', '빨간 날 다 쉬는 곳'이라는 옵션이 포함된 사무직에서 일하기 위함이었다. 돈을 포기하는 대가로 시간을 벌어들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근데 그 사이에 야근이 끼어들면 이직의 의미는 매우 옅어지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몸만 좀 더 편해질 뿐이지 정작 일하는 시간은 거의 같거나 오히려 더 많아질 수도 있으니까.
맨 처음에는 30분 정도 더 하는, 나름 귀여운 수준으로 야근하는 것에서 그쳤다. 그마저도 꽤 열받는 일이긴 했으나 그냥저냥 넘어갈 만은 했다. 그런데 야근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더니, 어느새 퇴근시간이 지나서도 평균 1시간 정도 더 있다가 집에 가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여기서 '평균 1시간'이라는 건 야근을 2시간도 넘게 하는 날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퇴근시간은 6시였는데 현장조사 나간 팀원들이 사무실에 복귀하는 건 대략 5시 30분에서 6시 사이였다(6시 넘어서 온 적도 많았다). 그러니까 빨라야 5시 30분에 사무실에 도착한다는 말인데, 5시 30분에 와도 이것저것 정리하면 6시가 되는 건 금방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현장조사 스케치를 바탕으로 도면화하는 작업인데, 세 명의 팀원들이 하루종일 조사한 것을 30분 안에 인계받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를 포함 다른 직원들이 정시에 퇴근할 수 있으려면 팀원들이 사무실로 복귀하는 시간을 앞당기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말해 팀장님에 달린 일이었다. 그러나 팀장님은 현장에서 30분 일찍 나올 생각은 타협의 의지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 칼퇴근은커녕 야근하는 시간이 점차 늘어날 수밖에. 동시에 직원들의 불만도.
차라리 야근을 꼭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면 얘기가 달랐을 것이다. 가령 내일까지 꼭 끝내야 하는 업무가 있으면 난 자진해서라도 남아서 끝까지 마무리 짓고 집에 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까지 끝내야만 하는 일이 있으면 어쨌든 무조건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보는 게, 회사에서 주는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직원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니까. 그리고 나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팀의 일일 거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 달 하고도 조금 넘게 일하다 보니, 내가 퇴근시간을 넘기면서까지 남아서 하는 일은 대부분 그날 그때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라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굳이 야근하면서까지 일하는 건 알고 보니 온전히 팀장님 때문이었다.
팀장님은 매번 일정이 바쁘단 말을 달고 살았다. 확실히 내가 봐도 우리 팀에게 주어진 일정이 여유롭진 않았다. 정확하게는 일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당최 가늠이 되지 않다 보니 여유를 부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근을 부르는 진짜 원흉은 빠듯한 일정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볼 땐 팀장님의 업무 진행방식이 문제였다.
이직했을 당시에는 현장 조사한 내용을 일일이 다 설명해 줘야 겨우 그릴 법했지만, 어느 정도 일이 눈에 익고 손에 익으면서부터는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새로 그려야 하는 게 있으면 일단 그리기부터 시작해서 막힐 때마다 질문하면 됐었다. 이미 그린 것들 중에서 수정해야 할 게 있으면 도면에 표시만 해서 내게 전달해 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팀장님은 그러지 않았다.
팀장님은 본인이 조사한 내역을 내게 전달할 때 '페이퍼'만 주지 않았다. 본인이 새로 조사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간단하게 선을 추가하거나 삭제하는 수정 작업도 옆자리에 앉아서는 일일이 말로 다 설명하며 지시했다. 가뜩이나 퇴근 시간 언저리에 사무실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조급한데, 스케치 도면에 훤히 표시되어 있는 것들을 일일이 구두로 전달하는 팀장님을 볼 때면 답답함이 사무쳤다. 작도 이외에 엑셀 작업을 할 때도 그랬다. 혼자서도 금방 할 수 있는 일을 팀장님은 꼭 옆에서 날 조종하듯 기입사항을 일일이 말로 전달했다. 나 혼자 곁눈질하며 입력해도 10분 안에 기입할 것들을 매번 팀장님 때문에 한 시간 이상씩 붙잡고 있으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팀장님도 야근시키는 게 영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던지 나름의 핑계를 달곤 하는데 그 핑계랄 것이 참 압권이었다. 가장 빈도수가 잦은 핑계는 바로 '오늘 하지 않으면 까먹는다'였다. 그 말을 들을 때면 답답하다 못해 온몸에 열이 바짝 오르곤 했다. 사무실에 컴퓨터는 세 대나 있고, 책상에 널브러진 게 다 메모지이며, 스마트폰의 기능은 또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급하지도 않은 일을 지금 하지 않으면 까먹을까 봐 굳이 퇴근시간 넘어서까지 한다니. 그건 이유가 되기는커녕 시대에 한참 뒤떨어지는 업무방식을 드러내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팀장님이 야근의 사유로써 '지금 하지 않으면 까먹는다' 다음으로 많이 써먹었던 말은 '오늘 무조건 해야 한다'였다. 무조건 해야 한다니 처음엔 순진하게 그 말들을 덥석 믿었더랬다. 그러나 무조건 해야 하는 것들 중에 진짜로 무조건 해야 하는 것들은 지나고 보니까 거의 없었다. 팀장님이 무조건 해야 한다는 건 실제 거래처 담당자가 정해준 기한에 따른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본인 뇌피셜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본인이 안 해놓고 퇴근하면 괜히 찝찝해서 나를 닦달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차라리 내가 눈치라도 없었으면 그나마 좀 나았을까. 하지만 팀장님의 레퍼토리는 참 한결같아서 눈치가 아무리 없었어도 금세 뽀록(?)이 났을 게 뻔했다. 여하튼 그런 사연으로 인해 언제부턴가 팀장님이 퇴근하면 난 속으로 다음과 같은 주문을 외웠다.
'제발 내 옆에 앉지 마라'
일단 내 옆에 앉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기본 30분 이상씩은 잡아먹고 들어갔으니까. 팀장님은 나이에 비해 극단적인 아날로그형 인재였다. 그에 비해 난 극단적인 디지털형 인간이었고. 하필 내 직속상사는 나와 상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