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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Oct 27. 2024

수습 기간 동안만 지켜보기로

ep 3. 마음속으로 아웃카운트를 세다


보아하니 내가 하는 해야 될 일은 팀장님과 과장님 그리고 선임님이 현장에서 조사해 온 바를 바탕으로 도면을 그리는 일이었다. 그 외 나머지 엑셀 잡무도 은근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으나,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도면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캐드(컴퓨터 설계 지원 소프트웨어 'AutoCAD') 숙련도는 자신 있었다. 학원에서 캐드를 배울 때도 강사님의 추천으로 인해 수강생 신분으로 다른 수강생들을 가르친 적도 있었고, 대학교 다닐 때에도 과제하느라 질리도록 사용을 많이 하기도 했었다.


내 위의 세 명 중에선 선임님이 캐드를 어느 정도 다룰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원래 그분이 캐드 작업까지 도맡아서 하려 했으나, 현장 조사는 조사대로 해야 하는데 퇴근 후에 캐드까지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너무 버거워서 나 같은 설계직원을 뽑은 모양이었다. 사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누구 생각인지 몰라도 제정신인 건가 싶었다. 캐드 작업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다 떠나서 현장에서 사무실로 복귀하는 시간이 빨라도 5시 30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드를 한다는 건 대놓고 야근을 기본값으로 매긴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굳이 직접 해보지 않아도 충분히 말이 안 되는, 퇴근시간의 의미가 없어지는 업무구조였다. 사무실의 리더인 팀장님의 아이디어는 아니었길 내심 바랐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만 하는 사람이 내 상사인 건 여러모로 불편할 테니까.


뭐 어쨌거나 이전의 정씨(나 이전 퇴사자)처럼 캐드부터 새로 배워야 하는 고충은 없었다. 문제는 현장 스케치도면이었다. 현장 조사자들의 스케치를 받아서 도면화를 시켜야 하는데 하나같이 스케치를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팀장님은 가장 정확하지만 심하게 악필이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선임님은 팀장님에 버금갈 정도로 정확하게 그려오긴 하지만 스케치에 소심한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서 문제였다. 얼마나 성격이 소심하면 일자로 죽 그어야 하는 선을 수십 번씩 긋는 바람에, 이게 수평인지 수직인지 아니면 비스듬하게 꺾인 건지 도통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글씨도 희한하게 악필은 아닌 것이 악필이었다. 그나마 필체는 과장님이 가장 깔끔했는데 조사해 오는 것마다 오류 투성이었다.


더군다나 세 명이 현장 조사를 하는데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사를 하니까, 그들의 스케치를 받아 통일된 형식으로 도면화시켜야 하는 나로서는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다만 세 명분의 스타일을 점차 적응만 한다면 나머지 일은 편할 것 같았다. 어차피 옆에 물어볼 사람도 없이 혼자 사무실에서 일해야 했기에, 되든 안 되든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보기로 하잔 마인드로 업무에 임했다.




"우리 근무시간을 좀 조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8시 30분에서 5시 30분 퇴근하는 것 말고,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거로. 어때요?"


"넵. 좋습니다."


근무시간 변경의 사유는 팀장님과 팀원들이 현장에서 돌아오면 나의 퇴근시간과 거의 맞물리기 때문에 인수인계할 시간이 없어서라고 했다. 설계직원이 나 이전에 두 명이나 있었다는데(정씨가 첫 번째로 들어온 설계직원인 줄 알았는데 그전에 한 명이 더 있었단다) 근무시간 조정할 생각을 이제야 했다는 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쨌거나 내 입장에서도 그게 차라리 나았다. 5시 30분에 상사들이 복귀하는 와중에 5시 30분에 퇴근하는 건 아무래도 눈치가 보일 테니까.


그런데 퇴근시간이 6시로 밀리니까 6시 10분 언저리쯤에서 퇴근하던 게 빠르면 6시 30분, 늦으면 7시도 훌쩍 넘어서 퇴근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부터 난 슬슬 마음속으로 아웃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3개월의 수습기간 동안 상황을 보기로 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딴 식으로 야근을 시키면 한 번 들고 일어서던지, 다른 곳을 알아보던지 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연봉이 반토막이 났는데 야근까지 하는 건 억울했다. 한두 시간만 야근하더라도 공장에서 일할 때와 근무시간이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야근이 만약 기본값인 거라면 공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돈이라도 많이 받는 게 더 나았다. 어쨌거나 내가 자초한 일이었고 책임은 내가 져야만 했다.


애초에 야근이 거의 없다고 했으면서 30분에서 1시간씩 야근을 시키는 것 자체가 짜증 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처음엔 섣불리 상황 판단을 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야근을 하면서까지 하는 일이 과연 야근을 하면서까지 해야 되는 일인 건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노을이 질 때까지 일하다가 사무실로 복귀한 상급자들도 바삐 일을 하고 있었으니, 한편으로는 혹시 지금이 바쁜 시기여서 그런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였지만). 그에 대한 진상은 업무파악이 돼야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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