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 난 신중하지 못했다
(본 글에서 언급하는 '캐드'는 컴퓨터 지원 설계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AutoCAD'를 일컫습니다.)
정씨는 내게 '성실히' 인수인계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건 이렇게만 하면 돼요."라는데, 뭐가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건지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냥 넘어갔다. 나라고 정씨 입장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정말 그렇게까지밖에 설명을 하지 못해서 그런 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한 지도 3개월 밖에 안 된 사람이라니까 대부분의 일들을 어차피 내가 새로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게 맘도 편할 것 같았다. 그렇게 둘 다 인수인계는 뒷전이고 쓸데없는 잡담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퇴근시간인 5시 30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5시 20분이 조금 넘은 시간에 팀장님과 면접 때 본 직원분 두 분이 함께 사무실로 복귀했다. 팀장님은 날 보며 애써 웃어 보였지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두 분도 표정이 절어(?) 있었다. 내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현장에서 정확히 어떤 식으로 일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힘들어 보였다. 커다란 가방도 각자 하나씩 메고 있었다.
"안녕하쎄요~"
팀장님이 '우리 회사에 입사한 것을 환영합니다'가 느껴지는 톤으로 인사를 건넸다.
"정씨한테 잘 배웠어요~?"
팀장님은 내게 말을 놓지 않았다. 첫날이고 어색해서 놓지 않는다기보다는 왠지 애초에 말을 쉽게 놓지 않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팀장님은 소파에 앉아 다른 직원분들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한 분은 과장님이었고, 한 분은 선임님이었다. 과장님은 사람이 무슨 캐릭터 같기도 하고 개그맨 같기도 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모든 면에서 평범한 사람 같진 같았다(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고 진짜 별난 사람 같았다). 그리고 선임님은 나와 나이가 같았다. 보니까 생긴 것도 비슷했다. 꼭 먼 친척이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세 분은 광주사람이고, 광주에서 파견근무를 왔으며, 사무실을 숙소로 쓰고 있었다.
세 명 다 커다란 가방만 바닥에 작업복 같아 보이는 조끼는 벗지 않았다. 팀장님은 소파에, 과장님은 나와 멀리 떨어진 컴퓨터에, 선임님은 내 바로 옆 컴퓨터에 앉았다. 할 일이 남았는지 컴퓨터로 무슨 업무를 보는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이 워낙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불안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퇴근 시간이 넘어가 있었다. 5시 30분에 칼퇴근을 할 줄 알고 있었는데 벌써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뭔가 일이 꼬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면접 때 질문한 건 '야근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여부 단 한 가지였고, 팀장님은 분명 야근이 거의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첫날부터 마주한 저녁 6시가 다 되어 갈 때쯤의 사무실의 풍경은 분명 '칼퇴근'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항상 불길한 예감이 들면 보통 잘 어긋나지 않던데, 그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못이라도 박으려는 듯한 발언이 팀장님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일찍 퇴근해 봐요~"
'뭐라고?'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너무도 충격적인 말이어서 잘못 들었을 확률은 매우 낮았다. 다른 뜻으로 오해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거리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팀장님의 말에는 '오늘은 첫 출근이니까 이만 퇴근하고 내일은 너도 우리와 함께 야근해라'라는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벌떡 일어나서 "야근 분명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라며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난 용기를 내지 못했다. 어딜 가도 고분고분하게, 좋게 좋게 넘어가는 타입인 내가 낯선 사람들 네 명 사이에서 갑자기 그러는 건 미리 마음을 먹고 있어도 힘들 일이었다.
분노에 가까운 뭔가가 내면에서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겨우 가라앉히고 일단은 집으로 가기로 했다. 이미 퇴근 시간을 넘겨놓고 뻔뻔하게 선심 쓰듯 말하는 투가 내내 거슬렸지만 내일은 다를 거라고 애써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까.
어느덧 정씨는 인수인계를 마치고 완전히 퇴사했다. 정말 정씨의 말대로 난 거기서 혼자 일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정씨가 퇴사하자마자 바로 혼자 사무실에 남는 건 아니었다(만약 그랬다면 난 아무것도 못하고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한동안은 나와 동갑내기 선임님이 옆에서 어느 정도 업무파악이 될 때까지는 있어주기로 했다. 일주일 정도 생각하고 있다는데 상황 봐서 한 주 더 옆에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마냥 옆에 계속 있을 수만은 없는 게 현장조사 일이 바빠서 그렇단다. 보아하니 선임님 본인도 현장에 들어가기 지지리도 싫은 것 같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선임님과 같이 있다 보니 그는 성격이 첫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내성적인 사람 같아 보이더니 확실히 소심했다. 근래 들어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소심한 것 같았다. 말을 걸지 않으면 도통 말하는 법이 없었다. 업무 통화를 하는 것만 들어봐도 사람이 보였다. 좋게 보면 친절했고, 나쁘게 보면 쓸데없이 저자세였다. 그 옆에서 난 일을 해야 하는데 여전히 뭘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선임님이 이래저래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긴 했는데 뭔가 설명이 시원치가 못했다. 와중에 확실한 건 예상대로 정씨가 말한 것만큼이나 그리 간단한 일 같진 않다는 점이었다.
정씨보다는 환경공학과를 나온 전문인력이자 업계 경력자였기에 선임님이 옆에 있으면 좀 나을 줄 알았더만, 실상 업무 파악면에서는 정씨가 옆에 있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마 캐드라도 할 줄 알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캐드마저 못했다면 일은 일대로 배워야 하고 프로그램은 프로그램대로 공부하며 연습도 해야 했을 텐데, 그건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물론 캐드를 할 줄 몰랐다면 뽑히지도 않았을 테지만. 듣자 하니 정씨는 이곳에 입사해서 캐드부터 새로 배웠다고 했다. 어쩐지 내게 인수인계하는 게 영 시원찮았던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근데 업무파악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퇴근시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분명 면접을 볼 때 팀장님은 야근이 있냐는 나의 질문에 야근은 거의 없다고 했었다. 그에 난 '야근이 아주 없진 않지만 아주 가끔은 있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가끔 한두 번씩은 기꺼이 야근해도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야근이 없다는 건 칼퇴근이 보장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막상 출근하기 시작하니 첫날부터 칼퇴근 따위는 없었다. 퇴근시간이 오후 5시 30분인데, 실제 퇴근하는 시간은 대부분이 6시 정각을 조금 넘어선 시점이었다. 하여 칼퇴근은 성립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야근을 했다 하기에도 참 애매한 시간에 항상 퇴근하곤 했다. 따지고 싶어도 따지기가 참 어중간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난 처음부터 들고 일어서야 했다. 그렇게 하루이틀이 지나니 팀장님은 점점 그 패턴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와중에 나는 양반이었다. 나는 그래도 원래 퇴근시간보다 겨우 30분 정도 더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과장님과 선임님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일하다가 퇴근했다. 사무실을 숙소로 사용하고 있어서 퇴근해 봤자 거기서 씻고 각자 방에 들어가는 게 고작이긴 하지만. 여하튼 현장에서 사무실로 복귀하면 밥도 못 먹고 두세 시간씩은 더 일하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면접을 보러 갔던 날에 이미 '상황'을 눈치채려면 얼마든지 챌 수가 있었다. 면접을 위해 사무실에 찾아갔던 시간이 오후 6시였는데 그때도 과장님과 선임님은 창가 쪽에 나열된 컴퓨터 책상에서 각자 현장 조끼를 입은 채로 업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눈여겨봤었으면 팀장님의 '야근이 없다'라는 소리가 구라(?)인지 아닌지는 얼마든지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물공장으로부터의 탈출이 간절해서 그럴 만한 겨를이 그땐 없었다.
한 일주일쯤 지났을까.
맘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울렸다.
'아..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최대한 신중하고자 했지만, 결국 난 신중하지 못했다. 야근의 빈도 수와 시간이 이 이상으로 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