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 또다시 새로운 시작
팀장님과의 면접이 끝나고 아내의 허락까지 얻은 후에 난 사무직으로 이직하기로 결정했다. 다니고 있던 주물공장에는 다음 날 퇴사통보를 했다. 연봉 7천이라는 액수를 인생에 두 번 다신 받지 못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미련이 좀 남긴 했어도,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받는 대가로 내 청춘을 몽땅 날리긴 싫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해볼 수 있는 건 할 수 있을 때 해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감하게 이직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다.
전 회사를 퇴사한 바로 다음 날부터 시작한 건 새벽기상이었다. 느닷없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로 한 이유는 시간을 조금 더 벌기 위해서였다. 물론 '하루 12시간씩 4일 근무 후 이틀 간의 휴무'로 돌아가는 3조 2교대 근무에서, 아침 9시에 출근하여 저녁 6시에 퇴근하며 빨간 날 다 쉬는 업무형태로 바뀐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시간은 확보한 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여름에 시원하게 일하고 겨울에 따뜻하게 일하는 사무직이라 한들, 퇴근하고 집에 오면 피로에 절어서 뭘 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더군다나 나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아내와 저녁도 먹고 담소도 나눠야 했으니, 6시에 퇴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터였다. 그리고 모든 걸 떠나서 퇴근 후에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직장인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개인적인 시간을 확실하게 확보하고자 한다면, 출근 전에 조금 더 일찍 일어나는 것 말고는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새벽기상을 처음 시도하는 건 아니었다. 평소 자기계발서를 자주 읽은 탓에 소위 미라클모닝으로 유명한 새벽기상은 이미 책을 읽고 몇 번 따라 해 본 적이 있었다. 근데 매번 작심삼일로 끝나기 일쑤였다. 의외로 새벽 일찍 일어나는 건 쉬웠다. 문제는 일어나고 난 다음이었다. 마땅히 할 것도 없이 무작정 일찍 일어나기만 하니까 금세 졸리기 일쑤였다. 물론 책에서 나온 대로 독서나 명상 같은 걸 따라서 하긴 했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기상시간을 앞당기면서까지 독서나 명상을 해야 하나 싶은 의구심을 안고서 도전했던 게 실패요인인 것 같았다.
사실 이번에도 할 게 없는 건 매한가지이긴 했다. 일단 독서부터 하기로 한 것도 이전과 비슷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많이 달라서 그런지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건 바로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새벽기상을 처음으로 시작한 날에 거실 창가로 쏟아지는 달빛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니 마음에서 갖가지 감정이 떠오르더니 어느새 난 독서가 아니라 글을 쓰고 있었다. 처음엔 어쩌다 보니 우연찮게 쓰게 된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건 2022년 6월 22일에 주물공장을 퇴사하고, 바로 다음 날인 2022년 6월 23일 새벽 동트기 전, 바로 그때부터였다.
돈을 포기하고 인생을 구하기 위해 '젊음'이라는 시간을 확보하려 한 입장에서 글쓰기에 정을 붙이게 된 건 다행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글쓰기만큼 하기 좋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글을 써 본 경험은 만무하고 문학 관련 전공을 이수한 것도 아니지만, 처음 시작한 글쓰기인 것치곤 노트북 키보드에 손을 올리기만 하면 뭐라도 술술 써낼 수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신기했다. 그렇게 난 전 회사를 퇴사하고 새로운 직장으로 가기 전 일주일이라는 공백을, 어디 놀러도 가지 않고 글쓰기로만 가득 채웠다. 그것만으로도 퇴사한 보람을 느꼈다. 덕분에 내면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안개의 일부분이 살짝 걷힌 듯한 기분도 들었다.
첫 출근하기 전 금요일에 팀장님은 내게 문자를 보내 출근 확정여부를 물었다. 이전에 도망간 사람이라도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세상엔 워낙 별의별 사람이 다 있으니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진 않을 것이었다. 여하튼 다음 주 월요일에 예정대로 출근한다는 답장을 남겼다. 주말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바람에 정신 차려 보니 이미 새로 이직한 회사로 출근하고 있었다. 이전에 면접을 봤던 그 아파트로 향하는 중이었다.
사무실이 집에서 너무 가까워 방심을 한 나머지, 첫날부터 지각할 위기에 놓였었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해 주는 대로만 잘 따라가면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코앞에 와서 신호가 막히는 바람에 방향을 틀었더니 길을 살짝 헤맸던 것이다. 사무실에 도착했을 땐 출근시간을 3분 넘긴 8시 33분이었다. 한 소리 들을 각오를 가슴으로 여미고 한쪽 눈을 질끈 감은 채, 사무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었다. 나이스였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키는 큰데 삐쩍 마른, 가수 '블랙넛'이 떠오르는 사람 한 명이 들어왔다. 나이는 나보다 어려 보였다. 여기선 그를 정씨라고 부르겠다. 인사를 하고 보니 정씨는 내게 인수인계만 하고 곧 퇴사할 예정인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던 일을 내가 이어받아서 하는 것이었고, 그 사람이 퇴사하게 된 덕분에 내가 그곳으로 이직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팀장님과 다른 직원분들은 현장조사를 나갔고, 보통은 6시가 다 돼서야 복귀한다고 정씨가 말했다.
아.. 음?
'6시가 다 돼서 돌아온다고?'
아니 퇴근 시간이 5시 30분인데 6시가 다 돼서 돌아오면, 난 알아서 집으로 가란 건지 올 때까지 기다리란 건지 뭐 어쩌란 건가 싶었다. 분명 야근은 없다고 했는데 정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칼퇴근은 못한다고 봐야 했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 해도 이제 막 들어온 신입사원이 상사들이 복귀하기도 전에 혼자 퇴근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갖가지 의구심과 불안감이 들었지만 일단은 묵혀두기로 하고 업무 파악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땐 그렇게라도 현실도피를 해야 멘탈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씨는 알고 보니 사회초년생이었다. 이 사무실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취직한 곳이고, 일은 겨우 3개월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건 '6시가 다 돼서 돌아온다' 이후의 두 번째 적신호로 여길 만했다. 아무리 첫 회사라도 반년도 채 되지 않아 퇴사한다는 건 미심쩍었으니까.
하나 미처 예상치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사무실에서 나 혼자 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근무지 주소가 아파트 주소로 되어 있던 것도 입사지원서를 넣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긴 했다. 왜냐하면 소수 인원이 모여 있는 아파트형 사무실에서 업무를 본다는 건, 곧 사람들이 들끓는 크고 체계적인 회사보다는 자유도(?)가 좀 더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훗날 내가 뭘 할지 확실하게 정해놓지 않고 이직하긴 했으나, 왠지 뭘 하더라도 블로그에 기록을 남기게 될 것만은 같아서 컴퓨터로 업무를 보는 사무직으로 옮기려 한 것도 나름의 전략이라면 전략이었다. 그럼에도 설마 혼자 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캐드라는 프로그램만 다룰 줄 알았지 업무 지식은 하나도 없었기에 최소 사수 한 명쯤은 옆에 붙여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마 사무실에서 혼자 일하게 될 거라고, 본인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혼자 이리저리 부딪혀가며 일했다고 정씨가 말했다.
혼자 일한다는 건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었다. 눈치 볼 사람이 없으니 밥도 혼자 편하고 느긋하게 먹을 수 있고(혼자 밥 먹는 걸 좋아한다) 쉬는 시간에 눈치 보지 않고 책을 읽든 글을 쓰든 할 수 있다는 건 좋았다. 그러나 혼자 있으니 업무 도중 이해되지 않는 게 있거나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볼 사람이 없다는 게 단점이었다. 쉽게 말해 혼자 알아서 다 해야 하는 것이었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할 줄 몰라서 못하는 바람에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것만큼 갑갑한 상황은 또 없는데, 그런 일만큼은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왠지 일어날 것 같았다.
정씨는 말년(?)이라 그런지 출근 시간도 안 지키더니 인수인계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몰라서 대충 얼버무린 건지 아니면 단순히 귀찮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보여주면서 '대충 이렇게만 하면 별 문제없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난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비록 업무에 대한 건 정씨보다 몰랐지만, 다양한 업종과 별의별 사람들을 거쳐왔던 경험을 떠올려 보면 모르긴 몰라도 정씨의 말처럼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달리 말해 정씨 말만 듣고서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여 혼자 머리 싸매고 씨름하는 그림이 훤하게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듯했다. 편하다고 편하게 있는다면 불편함이 배가 되어 돌아올 게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