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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Oct 27. 2024

한심한 상사에게 내 모습이 보인다

ep 18. 마음이 불편해졌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처음 이직했을 때까지만 해도 지금의 팀장님과의 인연이 그리 두터워질 줄은 몰랐다. 팀장님과 나 사이에 직원 2명이 더 있었고, 팀장님을 포함하여 그들 세 명은 광주에서부터 그리고 우리 회사로 한꺼번에 넘어오기 전부터 한 팀이라고 들었어서 나는 팀장님에게서 일종의 '예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한 팀이라고 생각했던 3인방은 알고 보니 벽면에다가 열 번 정도 뗐다 붙였다를 반복한 포스트잇 같은 사이였고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팀장님과 나 사이 두 명의 직원은 도망치듯 퇴사를 해버렸다. 덕분에 홀로 남은 팀장님과 원래부터 홀로였던 나는 뜻밖의 한 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팀장님과 본의 아니게 가까워지면서 난 팀장님의 별의별 모습을 다 보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난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고 답답하게 일하며 컴퓨터 활용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팀장님이 싫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팀장님은 그런 내 눈치를 살피게 됐다. 본인 밑에 있던 부하직원 세명 중 가장 순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가장 말없이 묵묵히 일만 하던 내가,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퇴사한 마당에 대체 이딴 식으로 야근할 거면 퇴근 시간은 왜 있는 거냐며 하극상이라도 벌이듯 뒤집어엎을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가뜩이나 상사답지 못한 팀장님은 그 후로 더더욱이나 상사답지 못한 상사가 되어갔다. 혹은 내가 부하직원답지 않은 부하직원이 되어 간 걸지도 모를 일이다.


퇴사하면 퇴직금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세월이 지나고 보니 어느새 난 싸가지 없는 부하직원이 되어 있었다. 팀장님이 뭐라 하면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팀장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꼭 한두 마디씩 걸고넘어지는 둥. 퇴근시간인 6시가 되면 옆에서 팀장님이 야근을 하든지 말든지 아랑곳 않고 잽싸게 퇴근을 해버렸다. 물론 정시에 퇴근하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상사가 옆에서 매일 한두 시간씩 남아서 일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혼자 집에 가는 건 여러 모로 신경이 쓰였고 적응하는 것도 힘들었다.


물론 난 맡은 바 업무를 충실히 수행한 데서 오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있었다. 팀장님은 착해 보이지만 결코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성격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고 할 말은 다 내뱉는 편이었다. 만약 내가 일을 똑바로 처리하지 못했다면 아무리 면접 때 본인 입으로 야근이 없다고 호언장담을 했었어도, 자기도 남아서 일하고 있는데 멀쩡히 칼퇴하는 나를 가만히 놔두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여태 사회생활하면서 만난 상사들은 하나 같이 다 재야의 고수들이었다. 인테리어 회사를 다닐 때도 그랬고, 목수 일을 배울 때도 그랬고 희한하게 나와 연이 닿는 사수들은 인성은 몰라도 실력 하나만큼은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그런 내게 팀장님은 '규격을 벗어난 유형'이었다. 난 우유부단한 팀장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한 파일이 어딨는지 매일 헤매는 팀장님이 탐탁지 않았다. 나와는 일절 관계없는 일이다만 노후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바로 우리 팀장님이라는 것도 찝찝했다. 팀장님은 내게 그저 한심한 상사에 불과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팀장님에게서 점점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봤을 때 팀장님의 가장 큰 특징은 우유부단함이었는데 돌이켜 보면 나도 우유부단할 때가 적지 않았다. 평소 난 책을 읽고 글을 쓰느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책을 읽을 때 한 권을 집중해서 읽지 못한다. 이 책도 읽었다가 저 책도 읽었다가 종이책과 전자책도 번갈아가며 읽는다. 물론 그것 또한 독서법 중 하나의 방식이라곤 하더라. 하지만 난 나만의 독서법이라기보다는 단지 이랬다 저랬다 하는 마음 때문에 이 책 저 책을 정신없이 드나드는 것이었다.


팀장님은 일을 처리할 때 효율적으로 한꺼번에 처리할 생각은 않고 눈앞에 뭐 하나 잡히기라도 하면 모든 걸 제쳐두고 그것만 파는 스타일이다. 난 그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내게도 그런 모습이 있었다. 가령 집안일을 할 때 설거지 거리를 싱크대에 가져다 놓다가 느닷없이 쓰레기봉투를 비우는 것. 빨래를 개다가 말고 갑자기 먼지떨이로 여기저기를 휘적거리는 것. 샤워하러 들어갔다가 계획에도 없던 화장실 청소를 시작하는 것 등이 그랬다.


팀장님은 환경을 생각한답시고 분리수거는 똑바로 하면서 정작 종이를 아껴 쓸 생각은 당최 없는 사람 같았다. 그것 역시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나름 분리수거를 한답시고 플라스틱, 종이, 캔 등으로 나눠서 담아놓지만 막상 버릴 땐 박스에 붙은 테이프를 그대로 붙여서 버린다거나 플라스틱인지 뭔지 분류가 애매한 것들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냥 플라스틱 통에 던져버린다.


팀장님은 빨래는 그렇게 매일 하면서도 정작 가스레인지 주변이나 화장실 청소는 거의 하지 않았다. 화장실 세면대도 그렇지만 특히 가스레인지가 심했다. 주로 찌개를 끓인다고 가스레인지를 많이 쓰는 것 같은데 그 주변을 1년에 한 번 닦을까 말까였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다. 곱씹어 보니 이것 또한 난 팀장님을 욕할 처지는 딱히 되지 못했다. 팀장님만큼 심하지만 않았을 뿐 나도 치우지 않거나 닦지 않는 곳들은 정해져 있었다. 아내가 없었다면 내가 살고 있는 집도 사무실 못지않게 지저분했을 것이다.


분명 처음엔 팀장님 흉을 맘 속으로 시원하게 보곤 했는데 어느새 그럴 때마다 마음이 몹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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