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9. 한편으로는 참 대단한 팀장님
우리 팀장님은 전형적으로 눈앞의 나무 한 그루에 온 정신이 팔려 전체적인 숲을 조망할 줄 모르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한두 번 해보고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작업이 주어지면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부터 고민하는 나완 달리, 팀장님은 방법론 따위는 고민치 않고 처음부터 하나씩 해나가는 스타일이었다. 처음엔 그런 방식이 정말 답답했다. 1시간이면 끝낼 수 있는 일을 2,3시간씩 붙잡고 늘어지는 건 늘상 있는 일이었다.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지 간에 화장실도 한 번 다녀오지 않고 끝날 때까지 일어서지 않았다. 그런 팀장님 옆에서 있다 보면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팀장님의 그런 성향은 나름 장점도 있었다. 난 극도로 효율성을 추구하는 편이라 매 작업마다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주로 구글링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업무 스킬을 배운다) 좀 더 쉽고 빠른 방법을 찾는데 재주가 있지만, 반면에 그런 방법을 찾지 못하면 금세 힘이 빠져서 업무 지속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달리 말해 내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면 웬만큼 빠르고 신속하게 업무를 끝내지만, 내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능기적거리면서 옳게 마무리짓질 못한다.
그에 비해 팀장님은 거의 모든 면에서 나보다 작업속도가 느리지만 하나씩 풀어가는 능력이 탁월했다. 팀장님의 그런 능력은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작업에서 특히 빛을 발휘했다. 이를테면 현장 업무부터가 그랬다. 팀장님이 현장에서 하는 일은 단순하게 보면 시설 구조를 파악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난이도는 알면 알수록 상상 이상이었다. 설치된 시설부터가 양이 적지 않은데 그 시설에 얽힌 배관들의 종류와 개수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양만 많은 게 아니었다. 거의 모든 배관들이 시설이나 구조물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가 않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거나 완전히 땅바닥에 기듯이 엎드려야 겨우 보일까 말까 한 것들이 많았다. 특히 천장을 열고 들어가서 조사하는 게 난이도가 극악이었다. 걸어 다니면서 배관을 조사하는 것도 힘든데 천장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배관들 사이를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로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포복해야만 지날 수 있는 곳도 많았다. 팀장님이 하는 현장조사는 정말 아무나가 못하는 일이었다.
근데 팀장님은 그 몸도 머리도 아픈 일을 혼자만의 힘으로 해냈다. 물론 2인 1조 작업이었기에 나나 다른 직원들이 옆에서 서포트는 해주었지만 모든 건 팀장님의 주관하에 진행되었다. 얼핏 봤을 땐 조사가 불가능할 것 같다고 여겨지는 곳도 팀장님은 기지를 발휘하여 어떤 식으로든 조사를 끝마쳤다. 난 보통 사무실에서 퇴근하면 들고 오는 팀장님의 스케치 도면을 보고 도면을 그리는 일을 했다. 가만히 앉아서 팀장님이 건네는 스케치도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언제 한 번은 기회가 맞닿아서 시설에 들어갔는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조사를 한 거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만큼 환경이 열악했다.
내가 그리는 거라곤 평면도에다가 배관 모양에 따라 선 몇 개만 직직 긋고 라벨을 붙이는 게 다였다. 그래서 현장조사가 그리 힘들 거라곤 생각 못했다. 하지만 막상 도면을 어느 정도 그러고 나서 팀장님 따라 현장에 다시 가보니까 나라면 도저히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을 법한 일들을 팀장님은 매일 해내고 있었다. 아마 그즈음부터 팀장님도 '보통'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두가 나지 않는 일 앞에서 난, 주눅이 들고 자신감이 없어지면서 포기하는 일이 잦았다. 작업의 전체적인 윤곽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들은 시도조차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팀장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씩 해나가는 사람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고 손사래를 치며 거부할 만한 일들을 팀장님은 하나씩 천천히 매듭을 풀어나갔다. 그런 팀장님을 보면서 조금씩 천천히 작게 작게 시작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습관을 다루는 자기계발서에 보면 작은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그 어떤 대단한 습관이라도 작게 작게 시작하면 언젠간 습관으로 몸에 밴다는 뭐 그런 내용들이다. 근데 팀장님이 딱 그런 식으로 일을 했다. 아무리 어렵고 난해하고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라도 1부터 차근차근 시작했다. 1부터도 시작이 되지 않으면 0.1부터라도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한 번 일을 시작하면 퇴근시간이 되든지 말든지 어떡해서든 진행을 하고 보는 사람이었다.
내겐 그런 면이 없었다. 평소 인터넷에서 파일 하나 다운로드할 때마다 어디로 받아졌는지를 몰라 매번 이 폴더 저 폴더 헤매는 팀장님을 볼 땐 안쓰러워 보이다가도, 어려운 작업을 결국 해내고야 마는 팀장님의 근성을 옆에서 직관할 때면 '내 것'으로 뺏고 싶단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곱씹어 생각해도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저리도 오랜 시간 동안 골똘히 생각하면서 기어이 해법을 찾아내고야 마는 팀장님을 볼 때면 질투가 나고 부러웠다.
팀장님 만큼이나 컴퓨터 활용 능력이 떨어지면 컴퓨터 근처에도 안 가는 게 일반적인데 비해 팀장님은 써도 써도 당최 익숙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컴퓨터 앞에서도 근성을 발휘했다. 가령 엑셀 작업을 할 때 마음처럼 복사가 되지 않으면 항목이 수십 수백 개라도 일일이 타이핑을 쳐서 완수를 하거나, 옆에서 내가 매크로를 활용하여 한꺼번에 작업하는 걸 볼 때면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며 메모지를 가져와 메모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만약 나였다면 팀장님처럼은 못했을 게 뻔했다. 수천 개의 항목을 복사로 한꺼번에 옮길 방법을 찾지 못했다면 상사에게 못하겠다며 말하든가 아예 포기를 했을 터였다. 부하직원이 옆에서 나보다 더 똑똑하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배울 생각은 않고 내내 시샘만 했을 수도 있다.
고로 지금의 내가 일이 희한하게 돌아가서 팀장님과 같은 직급을 달고 팀장님과 같은 직책을 맡았다면 아마 팀장님만큼이나 맡은 바 업무를 옳게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팀장님보다 빠르거나 느리게 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포기했을 확률이 현재로선 가장 높았을 거라고 생각된다.
팀장님은 기억력도 좋았다. 내가 살면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이나 좋았다. 보통 팀장님이 현장에서 조사한 것들을 엑셀에다가 기입하면 항목이 평균적으로 2,3천 개는 넘었다. 그런 항목들에 기재된 사항을 보지도 않고 읊는 건 내 기준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팀장님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억력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가끔 거래처 담당자가 "A는 100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하면 팀장님은 서류 확인도 않고 바로 "아니요. 거긴 75입니다."라고 대답했고 또 열에 아홉은 팀장님 말이 다 맞았다. 두 눈으로 직접 파일을 훑고 있는 사람보다도 팀장님의 기억력이 어지간해서는 정확도가 더 높았다.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착수했을 땐 업무와 관련된 대부분의 관계자들이 팀장님을 신뢰할 정도로 팀장님은 현장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심지어 현장 내부 직원들보다도 더.
어쩌면 내가 평소 팀장님을 그렇게 낮게 보고 은근히 무시하고 깔봤던 건 내겐 없는 것들이, 내겐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능력들이 죄다 팀장님에게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팀장님을 깔볼 때도 내가 보이더니 이젠 팀장님만의 탁월한 능력을 볼 때도 그런 걸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팀장님 너머로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