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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Nov 03. 2024

차라리 몰랐다면 어땠을까

달보의 짧은 소설 5


잠에서 깨면 해가 떠 있던 적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시간까지 퍼질러 잔다. 모닝콜을 여섯 개까지 맞춰도 봤지만 가장 먼저 일어났을 때 나머지 다섯 개의 모닝콜을 해체하고 다시 잠 들 때가 많다. 새벽에는 자다가 몇 번씩도 깬다. 하지만 해가 뜨기만 하면 어떡해서든 하루를 맞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늘어질 대로 늘어진다. 여태 출근하며 지각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예전에는 회사로 출근하면 6시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던지 타는 속을 달래느라 적잖게 애를 먹었다. 하지만 이젠 6시가 전처럼 기다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간이 다가오는 게 두렵다. 차라리 회사에서 이리 저리 치이는 게 더 낫다. 라는 미친 생각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퇴근하기가 싫다. 퇴근해도 이젠 그녀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를 '통과'한 후로 내 세계관은 동력을 잃은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토록 찬란했던 세상이 온통 잿빛으로 보일 리는 없을 테니.


그녀와 이혼한 지 석달 째가 되어 간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았다. 낌새가 이상한 건 지난 달부터였다. 내 안에서 은밀히 썩어가고 있던 뭔가가 드디어 돌파구를 찾았는지 온 몸 구석으로 뻗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딱히 아픈 곳은 없었다. 그런데 아팠다. 배고프면 밥도 챙겨 먹고 다녔다. 그런데 허했다. 그동안 보지 못한 친구들과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과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평생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살 거라고 믿었던 사람이 곁을 떠나갔으니 당연히 힘들 거라곤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내가 알고 있던 그런 힘듦이 아니었다. '힘들다'라는 단어로는 결코 가둘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 내 삶을 병들게 만들었다.


오늘도 자기 전 김치 냉장고에 있는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병을 꺼냈다. 이젠 마시지 않으면 잠에 들 수가 없다. 술병들을 커다란 원목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아이패드 옆에 내려놓고 잔을 가지러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유독 서랍장 위에 지맘대로 쌓여 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간만에 책이나 읽으면서 한 잔 할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비록 몇 장 읽지도 않고 아이패드를 건드릴 것 같긴 한데 일단은 서랍장으로 향했다.


이미 수차례 읽은 책들이 3, 읽으려고 샀지만 몇 년 째 방치되어 있는 책들이 7의 비율로 쌓여 있었다. 검지 손가락으로 책을 더듬으며 뭘 읽어볼까 훑어보던 중에 익숙지 않은 검은색 띠지가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 걸 보니 책은 아닌 것 같았다. 왠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꽂혀 있었던 걸까. 궁금한 마음에 꺼내서 펼쳐봤다. 그녀의 일기장이었다.


수많은 책들 사이에 꽂혀 있어서 챙기지 못한 걸까. 먹거나 자거나 SNS만 하던 사람이 일기는 또 언제 썼을까. 원래 같으면 펼쳐보지 않았을 터였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아니,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사생활은 존중하는 게 마땅하니까. 또 그래야 나도 존중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이 집에 그녀는 없다. 일기장 하나 돌려주겠다며 연락하기에도 좀 그랬다. 하여 딱 한 장만 읽어볼까 하고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곳엔 딱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임테기, 희미하게 두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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