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 없는 부모님의 호출을 대비하여

게으른 내가 열심히 살 수밖에 없는 이유

by 달보


MBTI에 따르면 'ENFJ'인 난 계획형 인간이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난 그다지 계획적이지 않았다. 여행 갈 때 아무 생각 없이 떠나길 좋아하고, 옷 살 때도 처음 들어간 매장에서 바로 사 입을 때가 많다. 주변 사람들은 날더러 그래도 계획적이라고들 하는데, 그럼에도 그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약속에 대해선 꽤 민감한 편이다. 스스로와의 약속은 잘 지키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은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단 한 번 약속을 했으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웬만하면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런지 난 사전 예고 없이 갑자기 나오라는 어른들의 연락이 가끔 당황스럽다. 처음엔 우리 부모님만 그런 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보니 아내 부모님도 비슷하길래 베이비붐 기성세대 특유의 문화인 건가 싶었다. 그들은 미리 약속하고 만나자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어디야?"

"집에 있습니다."

"그럼 넘어와~"


난 사람 만나는 일이 거의 없고 집과 카페로 동선도 단순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이다. 할 일이 하루종일 가득 들어차 있다. 책 읽고 글 쓰는 것만으로도 1년 365일을 혼자 보낼 수 있을 정도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출퇴근 전의 시간은 모조리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대비하여 공부하는 시간이라 여긴다. 그래서 더더욱이나 이런 연락을 받을 때면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른들에게 '집에 있다'라는 건 '딱히 할 일이 없다'로 간주되는 듯했다. 독서와 글쓰기는 일종의 뜨개질 정도로 취급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내키진 않지만 거짓말로 둘러대며 부름을 거절할 때가 많았다.


되도록이면 어른들의 호출이 떨어지면 웬만해선 얼굴을 내비치고 싶어 하는 편이다. 난 부모님들을 만나는 게 좋다.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은데,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이 나이에 가끔 용돈을 받기도 한다. 한편으론 그도 나름의 효도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도 있다. 나 한 번 잘 살아보겠다는 핑계로 평소 전화도 자주 안 드리고 먼저 찾아가는 법도 없으니, 그럴 때라도 호응하지 않으면 자식 된 도리를 대체 언제 하겠나 싶은 생각에.


10번 전화가 오면 대여섯 번은 거절하는 게 미안한 마음에, 미리 약속 잡고 만나잔 얘기를 조심스레 건네보기도 했지만 이젠 포기했다. 내가 살아온 세월의 두 배 이상을 산 분들의 몸에 밴 것들을 한두 마디의 말로 자극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난 더욱이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못하겠다. 시공간이 허락할 때 충분히 읽고 써야, 부모님들이 갑자기 연락 왔을 때 맘 편하게 보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당최 미리 약속을 잡지 않는 어른들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나름의 동기부여로 삼을 만한 요소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있을 때 잘하기 위해서라도 평소에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고 없이 날아드는 양가 집안 어른들의 호출 덕에,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 말고도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근데 글을 쓰다 보니 알겠다.

주변 사람들의 평이 옳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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