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사탕 몇 알 들어있는 건빵 먹어보신 분~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누런 봉투의 건빵이 있었다. 농촌에서는 귀한 간식이었을 것이다.
대체로 이런 모습인데 봉투색이 훨씬 더 짙었다고 기억한다.
1960년대의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이러면서 라떼 이야기 하나 풀어놓는다.
기억은 써야 맛이다^^
건빵도 먹어야 맛인 것처럼.
한 가지 떠오르면 줄줄이 사탕처럼
연이어 떠오르는 기억들은
그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서둘러
적어놓아야 나중에 치매 걸리더라도
읽어볼 거 아닌가.
거의 모든 습작생들은 이렇게 과거의 어느 한때
기억을 소환하는 글쓰기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상처가 있었다면 힐링의 시간이 되는 건 당연지사.
별 사탕 찾는 시간 -1
열 살 무렵까지 방학에는 미사리 근처 외가에서 보냈다.
(지금은 하남 미사지구로 각광받고 있는 바로 그 동네를 말한다)
방학식을 한 다음날이면 세 살 위였던 언니와 나는 어김없이 외가로 보내졌다.
마치 소풍 가듯 륙색을 짊어지고. 그 안에는 김밥이나 달걀 대신 얇은 여름방학 공부와 각종 숙제, 방학 일기공책 등등과 여름에는 수영복 일체가, 겨울에는 빨간색 스케이트가 딸려왔다.
짐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동화책은 한 권도 못 가지고 갔다.
언니와 내가 설마 TV도 없고, 피아노도 없고, 전기도 없고, 친구 1도 없는 외갓집에 가고 싶다고 졸랐을 리가 없지만 그때는 어린아이들의 마음 따위를 헤아려주는 시대가 아니었다. 먹을 것 천지 놀 것 천지였던 집을 두고 외갓집으로 유배 아닌 유배를 가 자그마치 한 달이나 살아야 했다.
방학식을 하고 집으로 오면 언제나 엄마와 일하는 언니는 대청마루에서 산더미 같은 짐을 싸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내 밑으로 줄줄이 있는 남동생 셋만 하더라도 엄마에게는 과한 육아였을 것이다. 게다가 엄마는 새로 시작하려는 아버지 사업을 도와주어야 했다. 언니와 나도 뒤질세라 놀이 감을 하나라도 더 가져가려고 책상 서랍이나 온 방을 뒤지고 다녔다.
시발택시(당시 아버지는 사업을 하기 전으로 택시회사 전무였으므로 회사 차였는지도 모르겠다)를 불러 무엇인가 잔뜩 싣고 엄마가 데려다주었다.
어느 해 여름인가는 비가 많이 와서 황산 어귀(지금의 고덕동쯤 될 것 같다)에서 시발택시 차바퀴가 진흙탕에 빠지는 바람에 운전기사가 그 비를 다 맞으며 바퀴를 빼려고 갖은 고생을 다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아이들을 예쁘게 치장시켜 외갓집 동네에서 잘난 척하고 싶었던 엄마는 우리에게 십 리 밖에서도 눈에 뜨일만한 꽃무늬 원피스에 새하얀 샌들까지 신겨 공주를 만들어놓았는데 그때처럼 엉망인 때도 없었으리. 결국 차는 움직이지 못했고 차에서 내린 기억까지 떠오르는데 대체 어떻게 십리가 넘는 외가까지 그 많은 짐을 가지고 갔는지 모르겠다. 다만 질척거리는 논둑길을 걸으면서 점점 진흙이 범벅이 되어가고 있는 새하얀 에나멜 샌들을 보고 울음을 참았던 기억만 날 뿐이다. 전화는커녕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외갓집 주소.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선리 199번지. 지금은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대단지 아파트촌이지만. 당시 아담하고 고요한 작은 마을에서 외갓집은 드물게 기와집이었다.
진흙탕 사건이 있던 그 해 여름 빼고는 깨끗하게 세차까지 한 시발택시가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기어이 외갓집 동네까지 들어갔다. 동네 어귀에 도착할 때부터 운전기사님은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클락션을 울려댔는데 번쩍거리는 택시만큼이나 윤기가 잘잘 흐르던 클락션 소리였다. 그러면 동네 아이들이 하나 둘 모이고 어른들도 아이들 뒤에서 구경을 나왔다. 시골 아이들은 거의 모두 새카맣게 탔고 거의 모두 기형적으로 튀어나온 맹꽁이배를 하고 있었고(나는 그 뱃속에 회충이 가득 들어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렇게 어리지도 않은 사내아이들 몇은 작은 고추를 달랑거리며 뛰어왔다. 차 안에 앉아 그 모습을 보는 언니와 나는 어쩐지 우쭐거리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 우월감이라니. 시골에서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은 레이스 투성이 원피스에 커다란 리본이 달린 밀짚모자까지 쓰고 등에는 작고 앙증맞은 륙색까지 메고 차에서 내리면 차를 빙 둘러서고 있던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입이 떡 벌어졌다. 모르겠다, 엄마는 그 잘난 맛에 차를 세차까지 시키고 방학 전날 시장으로 데려가 가장 비싸고 좋은 옷을 사 입혔는지도. 누구네 잘 사는 서울 언니로 통했던 엄마 역시 꽃단장은 필수였다. 엄마는 키도 크고 늘씬하고 옷태까지 장난 아니어서 그야말로 패셔니스타였다.
외갓집에는 시집가지 않은 네 명의 이모들이 우리의 시중을 들어주느라 한 달 내내 별별 고생을 다했다. 그렇게 공주로 한 달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2부에 계속)
그때 그시절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펄시스터즈의 커피한잔, 그리고 김추자의 님은 먼곳에. 님은 먼곳에는 TV연속극 주제가였는데 처음 들을때부터 빠져서 오직 이 노래를 들기 위하여 그 연속극 방영시간만 죽자고 기다렸던 기억. 초등학생이 좋아하기에는 가사가 너무 그렇지만, 하여튼 거의 미친듯이 좋아했다.
신해철이 불러주는 커피한잔도 굉장히 맛있다네^^
https://youtu.be/pvCzfh7-ccI?si=gJ-lZwyYfCqtsUdA
장사익의 애절한 목소리로 들어보는 님은 먼곳에.
https://youtu.be/L6uw-g_9Jxw?si=TB_jS5OdBQOg4swI
#별사탕 #건방 #옛날건빵 #그시절이야기 #라떼시절 #장사익 #신해철 #님은먼곳에 #60년대서울 #60년대 #어린시절 #추억 #외가집 #미사리 #하남시#자서전 #자전소설 #날마나쓰기 #글쓰기 #등단작가 #신춘문예등단작가 #소설가의어린시절 #작가적삶 #작가란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