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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경 Sep 15. 2023

마지막 깃털

-2023 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어젯밤은 힘들었다. 난데없는 불면의 밤이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다가 눈을 감았다. 그 책의 갈피는 어찌나 무겁던지 넘길 수 없었다. 나는 작가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덕분에 하루가 얼마나 길었는지, 덕분에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격정과 사무침과 흐느낌을 안겨주었는지 아느냐고. 부러움과 질투심이 가득 차 책은 덮을 수 없고 글은 심장에서만 펄떡거렸다. 검색과 삭제와 텍스트를 잇는 작업이 부질없어 보이는 날이었다. 오늘 나는 왜 이리 추울까. 자리에 누워서도 춥고 고통스럽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무슨 고통? 내가 생각하던 고통은 실연과 무지와 회환과 처절한 예술혼을 포함하여 양장본 갈피에서나 만날 수 있는 문어적 수사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 살갗이나 관절이나 가슴 어디쯤에서 통증을 느낀다기보다는 의식 속에 끼어 있는 멋 부림이 아니었는지.

잠이 오지 않으니 오히려 사물이 소리 지르며 달려드는 것 같았다. 추상명사까지, 어느 때는 ‘하염없이’라는 부사조차 두서없이 떠올랐다. 눈을 감아도 소용없는 것이, 환영인지 상상인지 모를 어떤 이미지들은 현실보다 더 선명해 보이는 것이다. 이를테면 2월.


2월 하면 오롯이 떠오르는 스산한 교실 풍경. 아무리 추워도 난로를 때지 않는다. 건성건성 때우는 수업은 오전만 있고, 그나마 자습이 많았다. 학년 마무리로 바쁜 담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입으로만 소리쳤다. 조용히 해. 반장은 이름 적어라. 딱딱하게 언 운동장은 햇볕과 그늘 사이 날카롭게 금이 그어져 있었고 그늘 속 철봉대와 정글짐은 텅 비어 있다. 연필을 쥔 손은 빨갛게 얼어 입김을 불면 김이 얼어 더 차가워졌다. 곧 봄이 올 것 같은데 진눈깨비나 바람이 몰아쳤고, 털이 죽은 낡은 스웨터는 바람이 숭숭 들어왔고 소매를 마무리 당겨도 팔목이 드러났다. 뺨이 갈라진 아이들 틈에서 나는 설빔으로 받은 두껍고 따스한 코트를 입고 조용히 책을 읽거나 공책 뒷장에 그림을 그렸다. 나는 떠들지도 않았고 누구와 싸우지도 않았다. 혹 누가 싸움을 걸어오면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고 했다.

허름한 입성의 반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 호두를 넣은 곶감과 집에서 며칠을 푹 고아 굳힌 쌀엿을 뭉텅이로 주고 새소년 같은 아동 월간지를 나란히 앉아 같이 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아이를 만났는데 나를 무척 미워했다고 한다. 마음을 담은 호의와 순수했던 친절이 그토록 엉망으로 치환된 그녀의 기억을, 그녀를 잊을 수 없다.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열었다. 3:00. 배경에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자신 있는 표정이 보인다. 다분히 작위적이다. 그렇게라도 힘을 내고 싶었나. 스무 살 이후 행복한 적이 없는 사람처럼 슬퍼진다. 즐거움이 있었다 해도 슬픔에 가까운 즐거움이었다고, 오래된 기억이 오래된 장소를 이리저리 끌고 갔다.

우유처럼 새하얀 눈길을 홀로 걷던 기억. 온몸이 얼어갈 때 두 손을 녹일 수 있고 마음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우유 한 잔이 그렇게도 그리웠다. 난로가 있는 다방에 들어가 뜨거운 우유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주머니를 뒤져보고 다방을 그냥 지나쳤다. 얼음이 서걱거리는 뒷골목으로 휘몰아치는 바람이 뺨을 가르면 성냥팔이 소녀처럼 따스한 불빛이 쏟아지는 창가를 기웃거리면서. 신문사 지하 윤전실에서 얻어온 원고지 묶음이 든 무거운 가방을 메고 타박타박.


그렇게 세시가 지났다. 내 숨소리를 내가 듣고 있다. 어느 순간 심장 뛰는 소리도 들려왔다. 살아있는 내가 싫었다. 그렇게 네 시가 지났다. 극세사 베개에 한쪽 뺨이 닿았다. 부드러웠다. 뜻밖의 환대를 받은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뺨을 더듬듯 베개를 쓰다듬었다. 무생물도 가끔 이렇게 나를 위로하곤 한다. 다섯 시가 가까워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눈꺼풀 아래를 지났던 모든 서러운 영상을 지우고 몸에서 뜯겨나간 깃털 하나를 붙잡고 싶었다. 

친밀하면서도 쓸쓸한 문장을 쓰고 싶다. 손에 잡히지 않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 같은 문장을 쓰고 싶다. 읽고 싶지만 읽어지지 않는 문장을 쓰고 싶다. 문장에 목이 졸리고 싶다. 핏기가 사라진 얼굴에 또렷하게 떠오를 고통을 환희라고 바꾸어 부르며 나의 사인(死因)을 희열이라고 적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해방된 글쓰기이다. 추락, 퇴폐, 질투와 분노, 광기와 유기, 파멸 같은 단어에 매혹된 지 오래되었다. 나의 발걸음이 늘 그쪽으로 향하는 것은 그곳에 그리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절실함이나 절박함이 글을 쓰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슬퍼하면서도 울면서도 글을 향하여 한 발짝씩 걷게 한다.

그곳을 향하여 나는 걸어간다. 내가 걸어가는 실패의 기록을 자화상처럼 보듬어 안고 이제 그 마지막 깃털을 뽑아낸다. 핏자국 같은 고통을 찍어 비로소 ‘자신에게 예의를 갖춘’ 길고 긴 편지를 쓰려한다. 그것이 나의 몰락의, 첫 번째 표정이다. 몇 년 전, 어느 평론가가 그렇게 말했듯. 


 지난 토요일, 함께 한 사람들에게 지난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실은 밤을 새웠다고. 그리고는 -잠이 오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써야 했던- 저 라이프로그를 읽어주었다. 읽으며 가끔씩 숨을 멈춰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꽉 차 있던 눈물이 와락 쏟아질 것 같았다. 다 읽은 종이를 접을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누군가 말했다.


“그 글은, 그 마음은... 마치 브람스 헝가리 무곡 4번 같아요.”


“짧고 강렬하나 영원히 지속될 슬픔 같은 것?”


누군가 그의 말을 받으며 5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곡이니 다 같이 들어볼까 했고 누군가 검색하여 2019년 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KBS교향악단이 연주한 앙코르곡을 골랐다. 볼륨을 높인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우리는 모두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조용히 들었다. 영하의 날씨에도 맨발 차림이었던 나는 온몸을 오들오들 떨면서도 아인슈페너를 마셨다. 어쩐지 그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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