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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경 Aug 21. 2023

울면서 잠든 밤

-첫사랑의 기억은 이렇게 소멸된다.

사람들은 첫사랑을 어디까지 기억할까?

사람들은 첫사랑을 언제까지 기억할까?

나의 경우, 한 삼십 년 마음속에 품었던 거 같다.

(나는 초지일관, 일편단심, 이런 성격이 있는 것 같다)

일주일에 한 번은 꿈에서 보았고, 감성이 폭발하는 순간에는 여지없이 첫사랑이 떠올랐다.


네이버에 6,700여 개의 글이 있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데 나의 소개를 이렇게 해 놓았다.


퇴폐적이며 감상적이며 비도덕적이며 비이성적이며 비논리적이며 충동적이며 무모하며 파괴적이며 열정적이었던

퇴폐적이며감상적이며비도덕적이며비이성적이며비논리적이며충동적이며무모하며파괴적이며열정적이었던

나이 소개글은 고등학교 졸업 후부터 결혼 전까지의 나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삼십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첫사랑에 대한, 이런 에세이를 발표한다.





울면서 잠든 밤


내가 재이에게 보고 싶다고 말한 밤 이후 수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무수한 꿈 속에서 재이에게 보고 싶다고 말했다. 재이는 늘 열아홉이나 스물이었고 나는 조금씩 늙어가면서.


수십 년 동안 서너 번쯤 재이를 만났다. 오래된 친구들 사이 길게 늘어선 테이블의 저쪽 끝과 이쪽 끝에서, 문상을 가거나 오는 자리에서 어둔 밤하늘을 등지고 서 있던 재이는 친구들 틈에 섞여서 무리 지어 손을 흔들고, 나는 그가 꼭 나에게 안녕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며칠씩 밤을 새워 뒤척였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어떤 시절, 대학 등록금이 17만 원일 때, 우리 가족이 힘들게 자리 잡은 오래된 가옥의 세가 20만 원일 때 나에게 17만 원을 준 적이 있었다. 빌려주는 거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으므로 아마 그 돈은 거의 모두 술을 사 먹는데 허비했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나는 그때 17만 원이면 지금은 얼마쯤 될까를 생각하며 살았다. 그 후의 나의 삶이 어찌나 핍절했던지 지금은 수백만 원으로 환산되는 금액을 마련할 수도 없었고, 그러므로 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언제인가 꼭 재이를 만나 돌려줄 거야.


스칼렛 오하라가 자신은 애슐리를 그렇게도 사랑한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 어리석은 생각을 레트버틀러는 간파하고 있었지만 맹목에 눈이 멀어 꿈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스칼렛은 결국 비극적인 운명을 살게 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를 읽을 때마다 나는 스칼렛 오하라의 충동적인 결정들이 얼마나 그녀의 삶을 파괴하는지 너무도 명확하게 보았지만 정작 나의 삶에서 재이의 환영이 얼마나 나의 정신을 소모시켰는지 대입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아니, 소모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재이로 인하여 나의 모든 글을 시작되었으니까. 나의 상상력, 나의 감성, 나의 고통과 슬픔, 나의 꿈은 모두 재이로부터 파생되었다.


십여 년 전, 단 한 번도 재이에 대하여 쓴 적이 없던 나는 어느 날 충동적으로 열아홉, 스물의 재이를 쓰게 된다. 쓰고 보니 원고지 200장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사실이었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픽션인지 나 스스로도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몰두해서 며칠 만에 완성했다.


어제, 오래된 원고를 정리하다 재이에 대한 글을 발견했다.

모든 문장들이 현재형으로 되어있는 중편소설이었다. 그 글을 쓸 때까지 재이는 가슴속에 영혼 속에 펄펄 살아서 나를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영원한 현재형이었다, 그래서 현재형 문장으로 마감 지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재이의 집을 찾아가고 재이를 찾아 검색하고 재이의 삶에 대한 전언을 들으며 재이에게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쓰고 있었으므로.


그런데.

어제 다시 재이에 대한 소설을 읽는데 재이가 보이는 게 아니라 나의 모습이 보였다. 오! 두 눈을 감고 재이에게 뛰어들고 있는 나. 아무것도 없는 허방을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 모든 슬픔의 수식어가 자신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지 재이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야.


나는 슬퍼야 했고 고통스러워야 했고 가장 치열하게 고독해야 했고 그 무엇보다 비참해야 했고, 파괴되어야 했다. 그것이 그때의 나의 자존심이었다.


재이는 나 스스로를 파괴하려는 나의 욕망 때문에 괴로워했는데 나는 정작 그의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그는 언제나 빛나고 있었다. 내가 너무도 싫어했던 그의 이성. 지금 생각하니 재이는 감성뿐인 나를 너무도 힘들어했겠군.


언제인가 장례식장에서 만난 재이를 나는 이렇게 썼다. 문도는 재이다.


구두끈을 매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조문을 마치고 빈소를 나서는 남자는 도심을 걸으면 쉽게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이 듦에 따르는 적당한 안일과 피로가 몸에 배어있는 남자는 한 여자를 평생 지배했던 자신의 아우라를 깨닫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가 믿는 신의 존재처럼 자신도 한 여자에게는 전지전능하며 무소부재하며 영원불변하게 존재하여 영혼 속에 박혀 있다는 것도 영원히 깨닫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남자는, 자신은 이미 잊었거나 잊고 싶어 하는 그런 몇 개의 기억을 지난 한 여자가 밤마다 자신에 대한 꿈을 꾸고 자신을 생각하고 자위하며, 자신을 향하여 기나 긴 편지를 쓰고, 그리고 자신이 사는 도시의 이름이라도 떠오르면 머리를 감싸고 눈동자의 핏줄이 터지며 가슴이 아파 허리를 구푸리고 해산하듯 거역할 수 없는 통증으로 고통당하는 여자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남자는, 자신은 이미 잊었거나 잊고 싶어 하는 그런 몇 개의 기억을 지난 한 여자가 밤마다 자신에 대한 꿈을 꾸고 자신을 생각하고 자위하며, 자신을 향하여 기나 긴 편지를 쓰고, 그리고 자신이 사는 도시의 이름이라도 떠오르면 머리를 감싸고 눈동자의 핏줄이 터지며 가슴이 아파 허리를 구푸리고 해산하듯 거역할 수 없는 통증으로 고통당하는 여자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문도, 너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 너, 말고, 너의, 손. 이 순간 나는 너의 구두끈이 되고 싶어 한다. 너의 손에 감겨, 나의 생에 매듭을 짓고 싶다. 문도, 너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 너, 말고, 너의, 손. 이 순간 나는 너의 구두끈이 되고 싶어 한다. 너의 손에 감겨, 나의 생에 매듭을 짓고 싶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재이로 인하여(내가 그렇게 믿었지만) 날마다 칼로 베인 것 같은 통증으로 글을 썼고, 울면서 글을 썼고, 울면서 재이에게 보냈고, 더 많은 글은 영혼 속에 각인해 버렸다. 그렇게 나는 환멸 속에서 살아남았다.


십 년 전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그때까지 재이는 신처럼 내 가슴 깊은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글은 신파가 되었다. 비이성적이어서 자신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문장들이 어제 온종일 내 가슴을 찔러댔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런 재이의 존재가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언제가 언제일까를 온종일 생각하다가 울면서 잠들었다.

어제는 재이가 사라진 날이다.




당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 킹크림슨의 에피타프. 그땐 이런 노래 좋아하는 인간, 꽤 많았다.


https://youtu.be/ATty9A8txd8





첫사랑을 생각하며 많이 들었던 스콜피언스, 그 중 still loving you. 곡도 미치도록 좋은데 가사 또한 당시의 내 심정...


https://youtu.be/rQLGLn246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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