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거미의 모성애
울산의 한 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아 선생님으로 첫걸음을 시작한 아들이 사과 한 상자를 보내왔다.
"맛있는 사과를 먹는데 엄마, 아빠 생각이 나서 보낸다"는 메시지는 받았지만
막상 사과 한 상자를 받고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지금이야 그깟 사과는 실컷 먹을 수 있을 만큼 살림이 나아졌지만
10여 년 전, 남편의 부도로 가세가 기울었을 때, 사과를 먹고 싶다는 아들에게
시든 사과 한 알조차 사 먹이지 못할 만큼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다.
내 생애 가장 슬프고 암울한 시절이었다.
눈물 마를 새 없이 숨죽이며 울다가 잠이 드는 밤이 많았다.
교통 범칙금마저도 밀린 적이 없었던 남편에게 "신용불량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모든 부동산과 통장의 잔고가 압류되고, 온몸을 동아줄로 결박당하듯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은 야박했다.
한 번만 도와 달라고,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나도 일어설 수 있다고 매달려도 세상은 냉혹하리 만큼 매정했다.
나는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바깥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지천명의 문턱에 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식당의 허드레 일, 가사 도우미, 아기 돌보미, 청소하는 일, 요양 병원의 환자 돌보는 일......... 법원 파산
많은 망설임 끝에 한 푼이 절실했던 나는 돈을 많이 준다는 대박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고단한 나날이었다.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다 보니 다리가 아프고 많은 설거지를 하고 나면 팔이 아팠다.
하루가 멀다 하고 코피를 쏟고, 파스로 온 몸을 도배해도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몸살로 밤새 끙끙 앓았다.
그래도 감기 몸살약 한 봉지 삼키고 다음 날이면 씩씩하게 일터로 향했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내 손가락에 낀 반지에 새겨진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아들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그리고 오래전에 읽었던 책의 한 페이지를 떠올렸다.
독거미를 연구하는 어느 생물 학자가 땅속에 굴을 파고
납작한 흙덩이를 맨홀 뚜껑처럼 덮고 들어앉아 있다가
굴 가까이 지나가는 먹이를 잽싸게 낚아채는 거미를 연구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독거미 암컷 한 마리를 채집했다.
그 거미 암컷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 암컷도 등 가득히 새끼들을 오그랑오그랑 업고 있었다.
나중에 실험실에서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알코올 표본을 만들기로 했다.
새끼들을 털어내고 우선 어미부터 알코올에 떨궜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어미가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이번에는 새끼들을 알코올에 쏟아부었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어미가 홀연 다리를 벌려 새끼들을 끌어안더라는 것이다.
어미는 그렇게 새끼들을 품 안에 안은 채 서서히 죽어갔다.
최재천의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中
한낱 미물인 거미도 자기 새끼를 아는데, 엄마인 내가 자식들을 위해 못할 일이 없었다.
나에게는 절망이라는 단어도 사치였다.
왜냐하면, 나는 어머니니까.
"신은 세상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을 나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내가 주저앉으면 내 자식들도 포기하고 주저앉을 까 봐 두려웠다.
내 몸이 부서져도 내 자식들은 당당하게 키워내 오늘을 추억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렇게 걸어온 10여 년의 세월, 돌아보니 마치 맨발로 사금파리 위를 밟고 걸어온 듯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시간들을 꽃길을 산책하듯 향기롭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