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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정 Oct 31. 2020

다듬잇 돌에 얽힌 사랑

아버지의 첫 선물

몇 해전 가을, 친정집 뒤꼍 늙은 감나무에서 홍시를 따다가 처마 밑에서 

뽀얗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다듬잇돌을 보았다.

그 다듬잇돌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각별한 추억과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그대로 둘 수 없어 

우리 집으로 가져다가 거실 한편에 놓아두었다.


그 다듬잇돌은 아버지가 어머니께 드린 첫 선물이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 가시는 바람에 가난한 집 맏아들이었던 아버지는 

홀어머니와 줄줄이 딸린 동생들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 되셨다.

변변한 밭뙈기 한 뼘이 없다 보니 소작을 짓거나 남의 집 일을 거들며 품삯으로 곡식을 얻어다 

입에 풀칠을 해야만 했다.

이렇게 형편이 어렵다 보니 혼기가 한참 지났어도 결혼은 꿈조차 꿀 수 없었는데, 

마을에 잡동사니 물건을 팔러 다니는 방물장사 아주머니의 중매로 아버지 나이 서른에 결혼을 하셨다.

혼기를 한참 지난 노총각이 열 살 어린 어머니를 각시로 맞이하고 보니 그렇게 고울 수가 없으셨단다.

그 고운 색시가 저녁이면 풀 먹인 옷가지나 이불 홑청을 들고 이웃집에 다듬이질하러 밤마실을 가셨다.

낮에는 들일에 바빠 밤에나 색시를 곁에 두고 싶은데 

다듬이질하러 이웃집에 마실 가신 어머니가 깊은 밤이 돼서 돌아오시는 게 야속하셨던 아버지는, 

며칠 동안 나무를 해서 장에 내다 팔아 그 돈으로 다듬잇돌을 사셨다.

커다란 돌덩이를 지게에 얹고 시오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뜻밖의 선물을 받고 좋아할 각시 생각에 아버지는 무거운 줄도 모르셨단다.

다듬잇돌을 보고 이리저리 매만지며 환하게 웃는 어머니 모습에 당신이 더 많이 행복하셨다던 아버지. 

유장한 세월이 흘러 그 지순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고 구순의 어머니는 다듬이질을 잊으셨다.


이제는 내게로 와서 나의 애장품이 된 다듬잇돌을 평소에는 화분 받침으로 사용하고 있다.

작은 화분 몇 개를 나란히 올려 창가에 두면 단아한 모양이 흡사 새색시의 모습처럼 단아하고 얌전하다. 

그리고 가끔은 실생활에 사용할 때도 있다.

다림질할 수 없는 청바지나 두꺼운 셔츠는 가지런하게 접어서 깨끗한 수건에 싼 뒤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양발로 꼭꼭 힘주어 밟아 주면  반드럽게 잔주름이 펴지면서 옷의 모양을 잡아준다.

색이 진한 옷이 있을 때는 사이에 비닐을 깔고 10여 분 올라가 골고루 밟은 다음 모양을 잡아서 말리면 된다. 

특히 집안의 식탁보나 탁자보, 피아노 덮개 같은 레이스 뜨기를 한 소품들은 뽀얗게 풀을 먹여 

이렇게 다듬잇돌 위에다 올려놓고 밟아 주면  풀이 골고루 먹어 오래도록 그대로 모양을 유지해 준다. 

그렇게 밟다듬이를 하다가 나도 어머니처럼 멋있는 다듬이질 소리를 내며 두드려보고 싶은 

엉뚱한 충동이 일 때가 있다.

그러나 도심의 아파트에서 어디 될 법한 소리인가?

어린 시절 잠결에 들려오던 어머니의 정겨운 다듬이 질 소리는 내 유년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어머니의 손때 묻은 다듬잇돌을 이제는 햇살 가득한 창가에 놓고, 

그 위에 바이올렛이 처럼 작은 화분을 올려 아름다운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가만히 손끝으로 다듬잇돌을 만지면 젊은 날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르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위해 첫 선물을 마련하시던 아버지의 따스한 마음결이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청량하고 경쾌한 어머니의 다듬이 질 소리가 들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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